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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유병욱 : 매일 똑같은 하루가 달라질 수 있을까요?


롱블랙 프렌즈 B 

매일 색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집니다. 제겐 그런 사람이 하나 있어요. 광고기획사 TBWA코리아의 유병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죠.
*2024년부터 그는 제작전문임원이라 불리는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의 직책을 맡고 있다. 다만 본문에선 그의 직책을 디렉터로 통일했다. 

저는 종종 그의 인스타그램을 염탐합니다. 그의 글이 꽤나 마음을 울리거든요. ‘인간관계는 인연이 아니라 의지다’, ‘크리에이티브는 좋은 매일의 반복’ 같은 문장이 저를 사로잡았죠. 이런 문장, 주로 산책을 하거나 동료와 점심을 먹다 떠오른 생각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그는 23년 경력의 카피라이터입니다. e편한세상의 ‘진심이 짓는다’ 캠페인, SBS ‘함께 만드는 기쁨’, 시디즈 ‘의자가 인생을 바꾼다’까지. 한 번쯤 본 익숙한 카피가, 그의 손끝에서 나왔죠. 

다들 사는 똑같은 일상. 유 디렉터는 그 안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리는 걸까요. 그 비결을 묻고 싶었습니다.


유병욱 TBWA 제작전문임원

유병욱 디렉터와 제가 마주 앉은 시간, 월요일 오전 10시였습니다. 부담스러운 시간일 법도 한데, 그의 표정에는 여유가 묻어났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좋다”는 표정이었죠. 

기다렸다는 듯 궁금한 걸 쏟아냈어요. 어떻게 좋은 문장을 쓰는지, 그만의 법칙이 있는 건 아닌지 물었죠. 돌아온 답은 의외였습니다.

“저는 ‘00 하는 방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이런 주제로 외부 강연 제안이 오면 거절하죠. 법칙으로 창의성을 키우는 데는 한계가 있거든요.

창의성이 1에서 10까지 있다면, 법칙을 외워서 6까지는 갈 수 있어요. 하지만 사람들이 놀라워하는 건 7부터입니다. 거기로 올라가는 건, 그 사람이 살아온 방식과 태도가 결정한다고 생각해요.”


Chapter 1.
문장과 가사를 매만지던 소년, 카피에 눈을 뜨다

유병욱 디렉터는 처음부터 광고인을 꿈꾸진 않았습니다. 어릴 때 그가 좋아한 건 책이었어요. 어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다른 지출은 아껴도, 책 구매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으셨거든요. 

글과 친하게 지내다 보니, 고등학생 땐 노래 가사에도 빠졌어요. ‘가요 하면 병욱이’로 통한 덕에, 유행곡을 개사해 수능 응원가를 만들기도 했죠. 

공부도 곧잘 했어요. 1995년 서울대 인류학과에 들어갔죠. 막연하게 ‘영화 속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처럼 고대 동굴을 탐험하는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한두 해 지나자, 고민에 빠집니다. 막상 어디서 일해야 할지 몰랐거든요. 카피라이터란 직업을 발견한 건, 그때였습니다.
*미국 영화「인디아나 존스」시리즈의 주인공. 보물을 탐사하는 고고학자 캐릭터이다. 

“뭘 하면 좋을지 고민하다, 내가 기쁨을 느끼는 순간을 생각했어요. 첫째, 글을 쓸 때. 둘째, 아이디어를 냈는데 사람들이 좋아할 때. 두 개를 활용할 직업을 찾았고, 카피라이터가 보였습니다.”

처음부터 길이 쉽게 열린 건 아니었어요.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인턴에 지원했지만, 보기 좋게 떨어졌죠. 당시엔 좌절감에 빠졌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새가 없었어요. 지인의 소개를 받아 2002년 작은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을 시작했어요. 재밌었지만, 2년 만에 권태기에 빠졌다고 합니다. 규모가 큰 브랜드를 맡고 싶었거든요. 

아쉬움이 그를 공부의 길로 이끌었어요. 2004년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운영하는 크리에이티브 강의를 듣기도 했죠. 

이때 그는 예상 밖의 기회를 만나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어떤 것’이라는 주제로 개인 발표를 하게 됐거든요. 뭘 찾아야 하나 싶어 무작정 서점으로 향했는데, 우연히 불교 미술 책이 눈에 들어왔대요. 

“큰 관심 없이 읽었는데, 재밌더라고요. 절의 모든 공간에 일정한 양식이 있고, 사찰 안 건축물 배치에도 상징이 담겨 있다는 걸 발견했죠. 철저한 설계가 조금이나마 이해됐습니다. 그리고 실제 절을 보니,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친 건축물이 저의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로 보였어요.”

불교 건축과 미술을 시작으로, 옛 그림을 하나씩 탐구해 나갔어요. 말 그대로 내 마음에 드는 어떤 것을 발견한 거였죠. 그는 발표 주제로 조선의 화가였던 정선鄭敾*을 주제로 선정했어요. 그의 그림이 발전한 과정과 이야기를 주제로, ‘조선 최고의 크리에이터에게 묻다’는 발표를 했어요.
*「인왕제색도」, 「금강산도」를 그린 조선 후기의 유명 화가. 

이 발표를 들은 강사. “너, 생각하는 방식이 좋다”고 칭찬했어요. 그리고 뒤풀이 자리에서, 강사는 종이에 “너는 훗날 ____하는* 사람이 될 거야”라는 덕담을 써줬습니다. 주인공은 당시 업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광고인, 제일기획 박웅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어요.
*유 디렉터는 이 문장 속 단어를 ‘낯간지럽다’며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한마디의 불꽃”처럼 다가왔다고 표현했다.  

그날부로 유 디렉터의 북극성은, 그 문장을 적은 박웅현이라는 사람이 됐습니다. 유 디렉터는 “박웅현은 제게 거인과 같은 존재”라고도 표현했죠. 이후 그는 5년간 유학·이직을 하며 실력을 쌓아, 2008년 박웅현 디렉터가 몸을 담기로 한 TBWA코리아에 들어갔어요. 

TBWA 사무실에서 인터뷰 중인 유병욱 디렉터. 카피라이터로 일하던 그는 2003년 박웅현 디렉터를 만나며 “인생의 방향타가 달라졌다”고 말했다. ⓒ롱블랙

Chapter 2.
생각은 집시처럼, 일은 군대처럼

유병욱 디렉터는 원하던 대로 박웅현 팀의 카피라이터가 됐습니다. 이때 그는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배웠어요. 당시 팀의 모토는 다음과 같았어요. ‘생각은 집시Gypsy처럼, 일은 군대처럼.’ 

“저희의 목표는 ‘안전한 조직’을 만드는 거였어요. 그러려면 생각할 땐 여기저기 떠도는 집시처럼 자유로워야 해요. 허무맹랑한 소리를 해도 ‘그게 뭐냐’며 비웃지 않아요. 그러다 뭔가 정해지고 일할 타이밍이 오면, 군대처럼 집중해 각자의 일을 했죠. 그게 우리가 결과를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유 디렉터는 7년간 선배 밑에서 이 생활을 반복했어요. 2014년, 팀을 이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을 때도 그가 세운 원칙은 같았죠. 이렇게 해서 2017년에 만든 대표 카피가 ABC마트의 ‘세상의 모든 신발’이었습니다. 

당신은 회사원이지만
등산가이고
야구팬이면서
아빠이기도 하니까

그 모든 당신을 위한
세상의 모든 신발
ABC마트

이 카피는 유 디렉터의 머릿속을 집시처럼 떠돌던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100% 그가 창작한 건 아니에요. 2004년 영국에서 유학할 때 마케팅 수업에서 교수에게 들은 말을 붙잡은 거였죠. 

수업에서 교수는 이렇게 물었다고 해요. “나는 누구일까요?” 학생들이 “교수님”이라고 하자, 그는 다시 물었습니다. “저는 지난달 호주 여행을 다녀왔고, 그곳에선 여행자였어요. 그럼 전 누구일까요?” 쉽게 답이 나오지 않자, 교수는 말했어요. “이렇게 한 사람을 정의하는 건 상대적인 일”이라고요. 

몇 년 전에 흘러간 대화. 어떻게 광고의 단초가 된 걸까요. 이것도 재능의 영역이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상상만으로 카피를 쓰면, 그때는 멋있어 보여요. 근데 막상 발표했을 때 사람들이 감탄하는 경우는 별로 없죠. 딱 내 생각만큼의 글이 나온 거니까요.

하지만 일상에서 꺼낸 카피는 반응이 좋을 때가 많아요. 문장에 힘을 주지 않아도, 내가 의도한 포인트를 사람들이 빨리 알아채거든요. 다들 겪는 경험이고, 감정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좋은 아이디어는 일상에 있어요. 그걸 예리한 시선으로 발견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죠.”

그러면서 유 디렉터는 덧붙입니다. 예리한 시선은 재능이 아니라 키우는 거라고요. 이걸 그는 “인생의 해상도를 높이는 것”이라고 표현했죠. 

유병욱 디렉터는 일상의 경험을 살려 광고를 만든다. ABC마트의 광고 ‘세상의 모든 신발’은 유학 시절 교수와 학생들의 대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ABC마트 유튜브

Chapter 3.
‘퇴근 후 떡볶이’로도 인생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

인생과 해상도. 어떤 느낌인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어요. 유병욱 디렉터는 부연합니다. “해상도 높은 인생은 남들과 같은 인생을 살지만 더 선명하게 경험하고, 풍부하게 음미하는 삶”이라고요. 

“일상을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행을 가면, ‘여행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보게 되죠. 모든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길거리의 풍경도 카메라를 꺼내 찍고, 부실한 간판의 식당에도 들어가고요.

하루에 10분, 혹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그런 순간을 경험하면 삶이 훨씬 풍성해집니다.”

사실 알고 있는 말이었어요. 하지만 실천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달리 먹는다고 당장 출퇴근길에 레드카펫이 깔리는 건 아니니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게, 유 디렉터가 예시를 듭니다. 퇴근 후 먹는 떡볶이를 이야기했죠. 

“떡볶이로도 해상도 높은 삶을 살 수 있어요. 아무렇게나 먹던 떡볶이를 천천히 먹어보는 거죠. ‘내가 사랑하는 떡볶이가 왔네. 한번 먹어 볼까? 고추장이 평소보다 더 매콤하네. 토핑으로 이걸 추가하면 이런 맛이 나고.’ 이 생각을 이어가면 떡볶이 안에서도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매력이 툭툭 튀어나와요.”

일상에서 기획 아이템을 찾는 제게 필요한 조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두를 위한 조언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세상에는 꼭 창의력이 필요하지 않은 일도 있으니까요. 그런 이들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물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모든 것에 크리에이티브한 요소가 있다고 봐요. 물론 단순노동처럼 크리에이티브가 끼어들 틈이 없는 일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런 일에는 지금의 인사이트가 적용되기 어려울 수 있죠.

하지만 삶이라는 카테고리에선 도움이 될 거라고 봐요. 일상에서 찾은 사소한 순간이, 나의 내일을 견딜 힘이 되거든요.”

그는 또다시 예를 들었어요. 이번엔 마트에서 산 딸기 이야기였어요.

“장 보다가 딸기를 샀는데, 단단하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알아보는 거죠.

‘이 딸기는 왜 단단할까? 아, 죽향이라는 품종이구나. 검색해 볼까? 설향 딸기는 과즙이 많아 금방 물러지는데 죽향은 단단해서 오래 먹을 수 있네. 야, 오늘 하루 지옥 같았지만, 이 순간은 재밌다.’

이 정도로 저는 그날 하루가 참 좋다고 느낄 때가 있어요. 이 경험이 쌓이면, 나중에 마트 딸기 코너를 지날 때 색다른 기분이 들겠죠. 딸기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유병욱 디렉터는 사소한 순간에도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많은 연필을 소개했다. 유 디렉터가 빨리 쓸 때 사용하는 연필들로, 10B 연필부터 뉴욕의 편집장들이 쓰는 연필까지 다양하다. ⓒ유병욱

Chapter 4.
내 안에 겹이 쌓일 때, 세상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는 떡볶이와 딸기를 음미하는 경험을 ‘겹이 쌓인다’고 표현합니다. “이게 공부의 본질”이라고도 말하죠. 자격증처럼 뭔가를 얻기 위한 공부와는 달라요. “전에 보이지 않는 게 보이면서 세상이 내게 더 많은 걸 안겨 주는 일”이죠. 

실제로 그는 나이가 들면서 ‘내 안에 쌓인 겹’을 더 많이 느낀다고 합니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 출장에서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에요. 18년 전에 한 번 가본 이후 다시 간 곳이었죠. 이때 그는 28살 유병욱이 의미를 읽어내지 못하고 지나친 그림에서 수많은 사실을 새로 발견했다고 합니다. 

“인상파에 대한 ‘겹’이 없던 2005년에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쳤던 그림들이었습니다. 존재했지만 내게 말을 걸지 않았던 그림들과 조금씩 말을 트는 기분은 꽤나 근사했어요. 말하자면 저는 ‘오르세’라는 텍스트를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 거죠.”
_유병욱, 『인생의 해상도』 118p

그의 말을 듣다 보니 삐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의 해상도를 높이는 지름길은 없을까요? 예를 들어 돈이 많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될 테니까요. 유 디렉터에게 물었습니다. 

“돈이 있으면 좋겠죠. 저도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와인을 한잔하는 삶을 꿈꿨습니다. 근데 진짜 그걸 실현하고 나니, 기쁨이 오래가지 않았어요. 입주하기 전이 제일 기뻤고, 그다음에는 제가 보는 풍경이 당연한 배경이 되더군요.

제가 믿는 진리가 하나 있어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진다’. 돈으로 빨리 얻은 경험은 빨리 사라집니다. 하지만 ‘내’가 개입된 경험은 내 안에 오래 남아서 절 행복하게 하죠.”

그러면서 유 디렉터는 자신의 책상 한편에 놓인 커다란 책을 보였습니다. 제목은 『더 카피 북The Copy Book』. 독일의 세계적인 아트북 출판사 타센Taschen에서 펴낸 책으로, 당대 가장 화제가 된 카피들을 모아 만들었죠. 나이키의 슬로건 ‘Just Do It’도 여기에 있었어요. 

살펴보니,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었어요. 직접 제본해 만들었죠. 영국에서 유학할 때 도서관에서 본 책이었는데, 절판돼 살 수가 없었거든요. 그 덕에 일일이 페이지를 복사하고 제본해 만든 겁니다. 

“아직도 책을 만들던 순간이 생생하게 기억나요. 도서관에서 페이지를 복사하고, 아내와 제본한다고 각을 맞춰 접착제를 바르던 순간요. ‘야, 건드렸잖아’면서 막 웃고, 접착제가 붙길 기다리면서 마신 맥주의 맛…. 결국 제게 남은 건 이 순간이에요. 이게 저를 풍요롭게 만들었죠.”

유 디렉터에게 ‘내가 개입된 행복한 경험’을 묻자, 영국 유학 시절 만든 『더 카피 북』을 소개했다. 절판된 책이라 직접 복사하고 접착제를 붙여 만들었다. ⓒ롱블랙

Chapter 5.
기록 : 오타는 괜찮다, 하지만 강박은 안 된다

삶의 해상도를 높이는 ‘시선’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걸 어떻게 표현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유병욱 디렉터는 여기서 ‘기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생각은 정말 빨리 날아가요. 아무리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순간도 언젠가는 다 잊히거든요. 기억한 걸 뇌의 한구석에 넣기만 하면 평생 다시 꺼내지 못하고 잊어버리죠. 하지만 그 순간을 기록한 걸 보면 다시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중요한 건 메모가 깔끔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유 디렉터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장을 보여주더군요. 오타와 비문이 가득했죠. ‘아이스바닐라라라라떼’ 같은 단어는 물론, 어린 아들과의 썰렁한 농담까지 쓰여 있었죠. ‘미국에 비가 내리면? USB’ 같은 것들이요.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이런 실없는 것도 다 적어야 해요. 아들과의 농담이 재밌어서 ‘그때 그 재밌는 거 다시 해보자’고 하면 절대 다시 안 해주거든요. 결국 이게 다 카피로, 나의 문장으로, 창작물로 이어지죠.”

실제 유병욱 디렉터는 자신의 아들이 던진 농담들을 모두 메모한다. “사과가 웃으면 뭘까요? 풋사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가, 가족에게 들려주면 좋아한다고. ⓒ롱블랙

동시에 그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덧붙였어요. 바로 ‘메모를 강박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 몸과 마음이 힘든 날까지 억지로 기록하지 말라는 겁니다. 

“가끔 지하철에서 음악도 못 듣겠는 만큼 힘든 날이 있어요. 그럴 때 억지로 뭔가를 내게 넣으려 하면, 그 행위 자체가 싫어져요. 인풋은 쓴 약을 견디며 마시는 게 아니에요. 즐거울 때 넣어야 계속할 수 있죠.”

유 디렉터는 이어 말했어요. 한때 그도 ‘왠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당대에 유행한 마케팅 책을 억지로 읽었다고 해요. 하지만 돌아보니, 정작 자신의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고요. 

“저만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롱블랙 피플 중에서도 세상의 흐름을 읽고 싶은 분들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보면 잠시만 쉬어도 ‘뒤처지는 건 아닐까’ 걱정하기 쉽죠. SNS를 켜면 다들 핫플에 가 있는 것 같고요. 하지만 그렇게 쫓기듯 얻은 정보와 자극은 나에게 쌓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깊이 세상을 볼 때와 아닐 때를 아는 것이에요. 유 디렉터는 이걸 ‘겹눈을 활용한다’고 표현했어요. 그가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20년 넘게 버틸 수 있는 힘이라고도 말하죠. 

“저는 트렌드 센싱을 위해 종종 ‘겹눈’을 활용해요. 잠자리 같은 곤충들이 가진 눈인데, 3만 개 정도 되는 ‘낱눈’이 모여 만들어진 거예요. 그 ‘낱눈’으로 모은 이미지를 조합해 세상을 인식하는 거죠.

제겐 SNS가 ‘겹눈’이에요. ‘지금은 이런 게 유행이구나’ 하면서 세상의 움직임만 대충 파악하는 거죠. 열심히가 아니라요. 그러다 깊은 정보가 필요하면,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에게 가서 묻거나 직접 체험해요. 절대 강박적으로 모든 걸 다 알아보려고 하지 않죠.”

유병욱 디렉터는 인풋을 넣고 기록하는 과정을 강박적으로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인풋과 일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롱블랙

Chapter 6.
당신의 삶에 피어 있는, ‘벚꽃 구간’을 헤아려 보세요

대화가 무르익었을 즈음, 유병욱 디렉터는 새로 떠올렸다는 단어를 하나 소개했어요. 바로 ‘벚꽃 구간’. 

1년이라는 시간을 빠르게 돌려 60초짜리 영상으로 만들면, 2~3초 정도 환하게 밝아지는 구간이 있다는 겁니다. 바로 벚꽃이 피는 봄날. 온 세상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순간이죠. 그는 인생에도 이런 ‘벚꽃 구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인생은 고통이 기본값이에요. 모든 순간이 행복할 수는 없겠죠. 그렇지만 우리는 그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야 해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죠.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벚꽃 구간’이예요. 후배와 함께 점심을 먹고 오는 길에 마주한 가로수 풍경, 괴로울 때 절로 어깨를 흔들게 만드는 음악을 듣는 순간…. 그때 느끼죠. ‘참 좋다. 이런 순간이 또 오겠지?’ 그런 순간이 늘고, 또 이걸 되뇔 수 있어야 삶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그는 ‘삶의 유한함’을 언급했습니다.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그 어떤 순간도 영원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기에 인생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 우리의 짧은 삶을 즐기는 방법이라고요.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죽음은 삶의 가장 큰 발명품이다.’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달으면, 순간순간을 허투루 살 수 없어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니까.

하루는 아이가 차 안에서 창문을 내리고 제게 손을 흔드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 이 모습으로 나에게 손을 흔드는 순간은 다시 오지 않겠구나’. 그럼 그 모습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져요. 이 순간의 행복을 만끽하려고 노력하죠. 마음속으로 ‘한 번만 더 흔들어 줬으면 좋겠다’고 빌면서요.”

유병욱 디렉터는 삶을 견딜 수 있는 행복한 순간을 ‘벚꽃 구간’으로 표현했다. 사진은 유병욱 디렉터의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메모들. ⓒ유병욱 인스타그램


롱블랙 프렌즈 B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한강을 건너 사무실로 돌아왔어요. 평소와 다를 것 없다고 느낀 사무실을 자세히 들여다봤습니다. ‘여행 필터’를 끼고서요. 

매번 지나친 사무실 TV에는 캐럴이 틀어져 있었어요. L의 책상엔 먹다 남은 샐러드가 놓여 있었죠. 연말이라 바쁜지, 일하면서 점심 먹는 일이 늘어난 모양입니다. 조만간 여유 있는 산책을 더한 점심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롱블랙 피플, 한 해가 40일도 남지 않은 요즘, 한발 빠르게 올해를 돌아볼까요? 여러분의 2024년을 60초로 압축한다면 어떤 모습인가요. 그중 벚꽃 구간은 얼마나 되나요? 혹시 떠오르지 않았다면,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마주한 오늘, ‘여러분의 벚꽃’을 더 많이 피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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