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엔 소품이 ‘무용한 물건’ 정도였다면, 이젠 ‘나를 드러낼 수단’이 된 거예요. 내가 무엇을 소비하느냐가, 내 정체성을 규정하는 시대가 된 거죠.”
_유세미나 오브젝트 대표, 롱블랙 인터뷰에서
소비가 나 자신을 규정하는 시대, 감각 있는 브랜드를 찾기 위해 사람들은 편집샵을 찾곤 합니다.
그들은 어떤 기준을 갖고 우리에게 제품을 추천할까요?
슬로우스테디클럽 : 변하지 않는 가치의 국내 편집샵

2014년에 원덕현 베네데프 대표는 서울 삼청동에 편집샵 슬로우스테디클럽을 열었습니다. 그가 매장을 연 건 그의 브랜드인 블랭코브를 소개할 만한 샵이 적다고 생각해서예요. 메종 마르지엘라Maison Margiela*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그는 메종 마르지엘라가 옷 브랜드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도쿄 쇼룸에 갔을 때 충격을 받았죠. 인테리어와 음악, 향과 옷걸이 같은 모든 요소가 마르지엘라를 말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옷이 브랜드를 완성하는 게 아니라 모든 요소가 하나가 됐을 때 진짜 브랜드가 완성되는 거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어요.
*1988년 벨기에 출신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가 설립한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실험적인 스타일과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슬로우스테디클럽은 편집샵이에요. 그는 편집샵과 멀티샵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멀티샵은 여러 브랜드를 한번에 소개하는 샵이에요. 창문에 어떤 브랜드를 취급하고 있는지 보통 적어놓죠. 특정 브랜드를 취급하는 것이지, 특정 스타일을 취급하는 게 아니예요. 편집샵은 달라요. 그 매장만의 셀렉션 기준이 있어야 해요. 딱 들어가면 여기는 이런 스타일을 바잉하는 곳이구나, 그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슬로우스테디클럽이 지향하는 스타일은 타임리스timeless예요. 원 대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예요. 그가 실제로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 중에 한 명은 디터 람스Dieter Rams입니다. 그가 디자인한 비초에Vitsoe*의 선반을 보면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죠. 옛날 것인 건 분명한데, 구식은 아니거든요. 그는 그런 것을 하고 싶다고 말해요.
*1959년 덴마크 출신 닐스 비초에가 만든 가구 브랜드. 디터 람스와 협업한 606 유니버셜 선반 시스템은 지금도 큰 인기를 끈다.

그는 타임리스를 추구하는 브랜드는 광고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본질적인 힘으로 오래 유지해야 하니까요. 슬로우스테디클럽이 광고를 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예요.
그래서 그는 그들이 힙hip하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들을 보면 놀란다고 말했어요.
슬로우스테디클럽은 힙하지 않은데, 아마 우리 스타일이 본인과 맞아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라 생각해요. 힙한 브랜드들은 젠틀 몬스터Gentle Monster나 아더에러Ader Error 같은 브랜드가 아닐까요. 저희보다 훨씬 강한 팬덤을 가지고, 빠르게 성장하잖아요. 이런 브랜드들이야말로 패션 브랜드라고 생각해요. 패션이란 말 자체가 최신 유행이라는 뜻이 있으니까요.
저는 트렌드를 이끄는 회사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트렌드라는 건 늘 돌고 돌아서 오는 건데, 그걸 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못 쫓아가는 순간이 오거든요. 그러면 올드한 회사가 되는 거잖아요. 전 자신의 방향대로 그냥 가는 회사는 올드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그건 깊이감이 있는 회사죠. 깊이 있고 잔잔하게 가고 싶어요.
그가 슬로우스테디클럽의 첫 번째 매장을 삼청동에 낸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에요. 삼청동이 패션의 동네는 아니잖아요. 번잡스럽지 않고 안정적인 느낌이, 그들이 추구하는 느리고 꾸준하고 잔잔한 분위기와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 그는 샵에서 한국의 이미지가 느껴지길 바랐어요. 해외의 편집샵들을 가다 보면, 파리든 뉴욕이든 도쿄든 그 도시의 무드가 느껴지는 매장이 강하게 기억에 남았거든요. 삼청동은 한옥도 있고, 북악산과 인왕산도 보이는데 반대편으로는 빌딩숲도 있잖아요. 그는 이런 조화가 서울을 상징한다고 생각했어요.
슬로우스테디클럽, 이름 그대로 느림과 꾸준함에 대해 얘기하는 원덕현 대표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더 읽어보세요!

포인트오브뷰 : 어른들을 위한 문구를 파는 국내 편집샵

김재원 포인트오브뷰 대표는 ‘성수동의 개척자’라고 불려요. 2014년 성수동에 100평짜리 인쇄 공장을 개조한 카페 자그마치zagmachi를 열며, “성수동에 가면 재밌는 것이 있다”는 입소문을 만들어냈죠.
이후 가정집 느낌의 카페 오르에르or.er, 소품 숍 오르에르 아카이브or.er.archive와 문구점 포인트오브뷰Point of View, 구움과자 가게 오드 투 스윗ode to sweet까지. 성수에만 4개의 공간 브랜드를 운영했어요.
지난해부터는 다 정리하고, 한 군데만 남겼습니다. 그 ‘남은 한 군데’가 어느 때보다 붐비고 있어요. 20평 남짓한 공간에서 출발해 200평 규모로 성장한 포인트오브뷰입니다. 2021년 2월엔 여의도 더 현대 서울에 2호점을 냈어요.
문방구란 어린 김재원 대표가 가장 설레며 찾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예전에 느꼈던 설렘이 사라졌단 걸 절감했죠.
“어느 날 포스트잇을 사러 갔어요. 포스트잇을 사기에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계산하는 저를 발견했어요. 어느 순간 문구점이 목적 지향적인 장소가 돼버린 거예요. 당시 모두가 라이프스타일을 고민하던 때였어요. 그렇다면 ‘워크스타일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라 공무원도 크리에이티브한 마인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예요. 요리를 훨씬 재밌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이런 예술가적인 마인드를 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_김재원 대표
김 대표는 문구점이란 세 글자를 바꿔놓습니다.
“그때 적어두었던 글귀가 있어요. ‘도구가 욕망을 진화시킨다’. 사람은 도구를 만들고, 그 도구로 인해 사람의 습관이 바뀌잖아요. 욕망도 진화시키죠. 우리는 문구라는 말 대신 ‘도구’라고 이야기하자고 정했어요. 포인트오브뷰는 ‘어른들을 위한 문구점’이라 불리지만, 저희끼리는 ‘창작의 장면scene에 존재하는 도구를 제안합니다’라고 이야기해요.”
_김재원 대표

프로이트의 책상에서도 영감을 얻습니다. 철학자,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로 알려진 프로이트는 글쓰기로도 유명했다고 해요.
“알고 보니 프로이트는 서재에 몇천 점에 달하는 유물을 수집해둔 사람이었어요. 프로이트에겐 그 모든 게 영감의 원천이었던 거예요. 책상도 인상적이에요. 노트나 펜만 정갈하게 있을 것 같지만, 여러 오브제가 놓여있었죠. 프로이트에겐 머릿속 산책을 위한 도구들이었어요.”
_김재원 대표
눈치챘겠지만, 포인트오브뷰는 실용적인 문구류만 취급하는 곳이 아니에요. 오브제나 액자, 골동품이 가득하죠. 3층 테이블엔 형형색색의 포장지를 두른 초콜릿이 수북하게 쌓였어요. 일하다가 간식을 찾으러 이곳저곳 누비는 우리의 모습을 연출한 장면이에요.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아요. 고객이 직접 발견하는 순간을 기다리죠. 그 과정이 참 재밌어요. 펜의 비주얼이나 성능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글을 쓰는 재미,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죠. 어떻게 하면 고객들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큐레이션 카드’를 생각합니다.
“공간 곳곳에, 도구에 대한 큐레이션 카드가 있어요. 다 읽으면서 돌아보면 두 시간도 더 걸려요. 사실 브랜드를 운영하는 입장에선 비효율적인 설계예요. 1000원짜리 지우개 하나 팔려고, 일주일 동안 지우개를 공부하는 거니까. 하지만 그런 시간들 덕분에, 브랜드의 핵심 가치를 쌓아나갈 수 있었어요.”
_김재원 대표
문구점이 어른들의 취향을 담은 공간이 되고, 현대인에게 워크스타일을 제안하는 콘텐츠가 되다니. 끊임없이 시대를 반영하는 건 브랜드의 숙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랜드 고유의 관점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김재원 대표의 이야기를 아래 링크에서 더 읽어보세요!

오브젝트 : 제품에 담긴 이야기를 판매하는 국내 편집샵

오브젝트Object는 신진 디자이너의 소품과 문구를 주로 취급하는 편집숍입니다. 서울과 부산, 제주를 넘어 일본 나고야와 오사카까지 9개의 매장을 두고 있습니다.
오브젝트에는 유세미나 대표가 세운 ‘입점 기준’이 있어요. 정리하자면 이런 거예요.
한국의 신진 브랜드를 받겠다. 단, ‘유행만 좇는 브랜드’보다 ‘이야기를 건네는 브랜드’와 함께 가겠다.
두 브랜드의 차이는 뭘까요? 유 대표는 오브젝트에 들어오려는 모든 작가와 이야길 나눴어요. 자연히 ‘잘 되는 브랜드와 작가’를 알아볼 수 있게 됐대요.
“간혹 본인의 디자인을 유행이나 가격으로만 정의하려는 분들이 있어요. 저희는 표면적인 이유보다 왜 이 일을 하는지, 꿈이 무엇인지를 함께 이야기해요.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점차 서로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어요.”
이야기를 건네는 브랜드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유 대표는 ‘최고심’을 이야기했어요.

인생네컷부터 신한카드, 현대백화점, 노티드까지. 분야를 안 가리고 컬래버레이션 제안을 받는 인기 캐릭터 작가죠. 유 대표와는 3년째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오브젝트에서 3번의 단독 전시도 열었고요.
유 대표는 최고심의 인기 이유로 ‘공감과 위로’를 들었어요. 삐뚤빼뚤한 선, 쨍한 색으로 그린 곰돌이와 토끼. 귀여운 이 그림에 사람들은 열광합니다.
“최고심은 매일 아침 새 그림을 SNS에 올려요. 출근길의 직장인에게 ‘할수있따’ ‘내가 해냄’ 같은 주문을, 비가 오면 ‘빗길 조심’ 같은 문구를 캐릭터의 말풍선에 그리죠.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50만 명 이상이 최고심의 아침인사 카드를 받아봅니다. 그림이 귀엽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위안을 건네준다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건 매일매일 그 이야기를 꾸준히 전달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야기가 선명하니, 최고심의 그림은 ‘간직하고 싶은 물건’으로 재탄생해요. 가장 유명한 제품은 부적입니다. 세로로 긴 코팅지에 ‘기분이 좋아지는 부적’ ‘좋은 꿈 꾸는 부적’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죠.
가격은 고작 500원. 남는 돈은 없대요. 그렇지만 유세미나 대표는 최고심 작가에게 강조했어요. “부적이 최고심의 코어 제품”이라고.
“판매자 입장에선 500원짜리 부적보다, 에코백이나 키링을 하나 더 파는 게 마진이 좋아요. 하지만 최고심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브랜드예요. 위로를 받고 싶은 사람에게, 부적은 ‘오래 위안받을 아이템’인 거예요. 부적으로 최고심을 간직한 사람들은, 다음에 또 다른 메시지를 얻으러 오브젝트를 찾을 테죠.”
쉽게 버리지 않는 물건을 앞으로도 팔고 싶다고 말하는 유세미나 대표의 이야기를 아래 링크에서 더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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