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블랙 프렌즈 B
에르메스, 샤넬, 루이비통, 디올의 공통점은? 1954년 설립된 프랑스의 명품 위원회, 코미테 콜베르Comité Colbert* 소속이에요. 이 럭셔리 브랜드들 사이에 한 도자기 회사가 나란히 있어요. 오늘 소개할 베르나르도Bernardaud예요.
*럭셔리의 개념을 알리는 협회로, 90여 개의 프랑스 명품 브랜드가 소속돼 있다. 베르나르도는 1962년 합류했다.
베르나르도는 160년 전통의 프랑스 도자기 브랜드예요. 프랑스의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Palais de l'Élysée을 비롯해, 전 세계 왕실과 5성급 호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에서 베르나르도의 식기를 선택하죠. 이유가 뭘까요?
차승희 신라호텔 F&B 플래닝 인차지
이달 초, 서울 한남동 베르나르도 매장에 예술작품 두 점이 공개됐어요. 지난 10월 작고한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를, 베르나르도의 도자기로 구현한 겁니다. 박 화백의 유작이에요.
도자기에는 박 화백이 생전 공기색*이라 부른 맑은 청회색 빛과, 황금 올리브색이 생생히 담겼어요. 박 화백이 원하는 빛깔을 내고자 베르나르도는 꼬박 3년을 투자했습니다. 프랑스와 한국 사이로 실험작이 30번도 넘게 오갔어요.
*박서보 화백은 제주도의 지평선을 바라보다가 하늘과 바다 사이 그 어딘가의 색을 표현하고자, 흰색이 많이 들어간 색의 작품을 만들었다. 박 화백은 그 색을 공기색이라 불렀다.
11월 9일 서울을 찾은 미셸 베르나르도 회장은, 직접 작품을 소개하며 박 화백을 추모했어요. 저녁엔 베르나르도 식기를 쓰는 레스토랑에서, 롱블랙과 식사를 겸한 인터뷰를 했습니다.
Chapter 1.
윤슬처럼 반짝이는 도자기
흰 식탁보 위로 더 새하얀 접시가 올라와요. 베르나르도 ‘에퀴메Écume(거품)’ 컬렉션이에요. 이 둥근 그릇, 가장자리에 거품처럼 작고 동그란 문양들이 음각으로 새겨졌어요. “사진보다 화사하다”는 말에 미셸 회장이 미소 지어요.
“해변을 거닐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봤어요. 물보라에서 영감을 얻어, 접시에 패턴을 새겼죠. 에나멜로 광택을 더하자 촘촘한 음각들이 빛을 튕기더군요.”
그릇의 가장자리가 윤슬처럼 반짝여서 안에 담긴 캐비어의 짙푸른 색감이 돋보여요.
“베르나르도는 브랜딩을 앞세우는 브랜드가 아녜요. 장인정신을 지닌 생산 전문 브랜드죠. 셰프의 아름다운 요리가 살아나도록, 최고의 캔버스가 되길 지향합니다.”
이런 철학 덕분에, ‘요리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식기’로 불려요. 베르나르도에서 식기를 맞춤 제작하는 게 많은 셰프들의 로망입니다. 고령토*를 1400도의 초고온에서 구운 도자기는 백금으로 불릴 만큼 희고 견고하죠. 프랑스에서는 대를 이어 쓰는 접시로 유명해요. 미셸 회장은 이 차별점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위 속의 광물이 풍화 작용을 받아 이루어진 흰색 또는 회색의 진흙.
Chapter 2.
견습생, 회사의 주인이 되다
베르나르도는 프랑스의 평화로운 소도시, 리모주Limoges에서 탄생했어요. 파리와 리모주의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 정도. 리모주는 ‘도자기의 도시’로 불려요. 양질의 고령토가 풍부해, 프랑스 도자기의 절반 이상이 이 지역에서 만들어지죠.
우아한 식기가 인기였던 1863년, 리모주에 새 도자기 공장이 문을 열었어요. 당시 레오나드 베르나르도Léonard Bernardaud라는 견습생의 손재주와 근성이 남달랐어요. 20년 뒤 레오나드는 회사의 영업을 총 책임집니다. 1900년엔 회사 이름에 자신의 성姓 ‘베르나르도’까지 넣었죠.
“그렇게 1대 경영자가 된 레오나드가, 제 증조할아버지예요. 견습생에서 출발한 그는 도자기 회사의 대표가 됐고, 1911년 뉴욕 사무소를 열어 미국 시장을 개척했어요.”
레오나드는 1923년 두 아들 미셸Michel*과 자크Jacques에게 사업을 물려줬어요. 이들은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손에서 도자기를 놓지 않았어요. 3000만 명 넘게 방문한 국제박람회에서도 아르데코Art Déco** 식기를 전시했어요. 그런데 형제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현재 베르나르도를 이끄는 5대 경영자와 이름이 같다.
**파리 중심의 1920~1930년대 장식미술. 기하학적인 동심원, 지그재그 패턴이 도드라진다.
“당시엔 가마에 불을 지피는 게 무척 어려웠어요. 적정 온도를 맞추려고 며칠씩 고생했답니다.”
다른 도자기 회사들은 이 ‘오랜 불편’에 순응했어요. 하지만 베르나르도 형제는 해결책을 찾았어요.
“24시간 가동되고 고온을 유지하는, 거대한 터널식 가마를 구상했어요. 프랑스 최초의 도전이었죠. 투자비가 1년 치 매출에 달해 리스크가 컸어요. 가족의 자산을 걸고 도박하는 셈이었습니다.”
용감한 도전이었던 터널식 가마는, 전환점이 됩니다. 생산량이 대폭 늘고 품질도 균일해졌거든요.
“그 결정을 생각하면 겸허해져요. 우리가 누리는 모든 혜택은, 선대가 내린 현명한 결정 덕분이에요. 세상에 당연하게 얻어진 건 없어요.”
공예가 정신을 심다
선대 미셸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형제인 자크가 3대 경영자가 됐어요. 화가였던 자크는 도자기에 ‘공예가 정신’을 더했습니다. 그 정신은 지금도 이어져요. 모든 도자기의 유약을 일일이 손으로 바르고, 찻주전자 하나를 만드는 데 일주일씩 투자해요. 반죽과 성형, 장식, 굽기까지, 50명이 넘는 장인의 손을 거칩니다.
“전임자들이 세운 높은 기준을 허물지 않아요. 기준에 신기술을 접목해, 오히려 더 높은 기준을 만들죠. 세월이 흐를수록 진화하는 겁니다.”
4대 경영자는 선대 미셸의 아들, 피에르Pierre 베르나르도예요. 피에르는 도자기 형태를 기계로 만드는 현대식 금형 기술을 개발했어요. 처음으로 TV 광고도 집행했죠. 이 피에르가 바로, 지금 5대 경영자인 미셸 회장의 아버지예요.
160년간 도자기 산업을 이끈 베르나르도 가문. 2006년엔 프랑스 주 정부로부터 ‘살아있는 문화유산 기업*’ 라벨을 받았습니다.
*Entreprises du Patrimoine Vivant. 장인정신을 기반으로 한 지역에서 50년 이상 고도의 기술을 쌓은 브랜드에 수여한다.
Chapter 3.
럭셔리란, 욕망을 부르는 것
싱싱한 보랏빛 꽃과 오렌지를 얹은 샐러드가 베르나르도 접시에 담겼어요. 미셸 회장은 즐겁게 말해요.
“지금 같은 때, 보람을 느껴요. 셰프의 정성 어린 요리가 주인공이 되고, 손님들이 이를 음미할 때 말예요.”
그릇은 결코 주인공이 아니라는 미셸 회장. 그럼에도 사람들이 베르나르도를 ‘테이블 위의 에르메스’라 표현하고, 갖고 싶어 하는 이유는 뭘까요?
“럭셔리란 ‘욕망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에겐 공통된 욕망이 있어요. ‘소중한 사람과 아름다운 식탁에 마주 앉고 싶은 마음’이죠.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사람들이 베르나르도를 욕망하는 건, 최고의 식사를 꿈꾸는 일의 연장선이라는 거예요.
“테이블웨어는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식탁에 모인 사람들에게 ‘여행’을 선사할 수 있어요. 마치 음악처럼, 우리를 잠시 다른 곳에 데려가죠.”
그래서 베르나르도는 다채로운 식기를 선보여요. 동양적인 화조도花鳥圖*를 새긴 ‘오오와죠Aux Oiseaux 컬렉션’으로 숲의 무드를, 루이 14세 시절의 축제를 그린 ‘베르사유 앙상떼Versailles Enchanté 컬렉션’으로 17세기의 프랑스를, 노트르담과 몽마르트르를 새긴 ‘투 파리 컬렉션Tout Paris’으로 파리를 테이블에 올려요.
*꽃과 새를 그린 그림.
하지만 고가의 식기를 누구나 살 순 없습니다. 그래서 미셸 회장은 2020년 세계 최초로 서울 매장 안에다, ‘카페 베르나르도’를 열었어요.
“커피와 디저트를 주문하면, 베르나르도의 찻잔을 골라 사용할 수 있어요. 구매하지 않아도 티타임을 통해 경험해 보는 거예요.”
‘감도 높은 시간이 쌓여 감각이 된다’고 미셸 회장은 믿어요. 프랑스 리모주의 공장 두 곳에선, 미셸 회장만큼 감도를 소중히 여기는 550명의 직원이 연간 200만여 개의 도자기를 생산합니다.
“욕망을 부르는 물건은, 감각의 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 나와요. 바로 장인들이죠. 지속 가능한 럭셔리를 위해, 지속적으로 장인을 배출할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Chapter 4.
아티스트와 한계에 도전하다
초현실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현대 미술가 제프 쿤스Jeff Koons, 영화감독 데이빗 린치David Lynch, 102세의 패션 아이콘 아이리스 아펠Iris Apfel… 50명이 넘는 예술가들이 베르나르도와 컬래버레이션 작품을 만들었어요.
“19세기에 지어진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 샤갈이 그린 유일한 천장화가 있어요. 이를 베르나르도의 그릇에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예술을 일상으로 옮기고 싶었어요.”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
그렇다면 베르나르도는 어떤 예술가와 함께하길 원할까요?
“마음이 통하는 게 중요해요. 서로 철학을 나눌 수 있다면 일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니까요. 보통은 마감을 정하진 않아요. 1년이든 3년이든,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올 때, 그때가 마감일입니다.”
베르나르도 직원들의 장인정신이 기본기라면, 예술가와의 협업은 도전이에요.
“예술가와 난제를 해결할 때, 100살 넘은 브랜드도 성장하더군요. 그걸 알기에 어려운 과제에 뛰어들 수 있어요.”
제프 쿤스의 상징적인 작품 ‘벌룬독Balloon Dog’을 도자기로 재현할 때도 그랬어요. 이 도자기 작품, 육안으로는 원작의 스테인리스 스틸과 구분이 어려워요. 베르나르도의 장인들이 매끈한 질감을 완성하고자, 도자기에 티끌만 한 흠도 허용하지 않았거든요. 새파란 색감이 쨍하면서도 거울처럼 빛나는 ‘미러 코팅’을 위해, 모델링 전문가, 디자이너, 유약 장인이 3년간 신기술을 연구했어요. 가격은 하나당 5000만원대.
“예술가들은 타협하지 않아요. 박서보 화백도 마찬가지였어요. 1400도에서 도자기를 구우면 색감이 날아가 계획대로 되지 않아요. 박 화백이 원하는 빛깔을 내려 끝없이 실험했죠.”
이렇게 완성한 한정판 작품들은 미술계에 소개돼요. 컬렉터들의 이목을 끌고, 국립박물관에 전시됩니다. 예술작품으로 소장 가치를 지니는 거예요.
Chapter 5.
전통과 혁신의 조화
팬데믹 때 “휴가를 어디서 보내고 싶냐”는 외신 기자의 질문에 “서울”이라고 답할 만큼, 미셸 회장은 한국을 좋아해요. 리모주에선 아내와 김치를 담가 먹는다고 해요. 베르나르도에 한식기 세트도 있죠. 지난 7월엔 ‘에퀴메 서울 핑크’라는 분홍빛 식기를 한국에서 단독으로 출시했어요.
“종로 인사동에서 한국 도자기를 구경할 때, 참 즐거웠어요. 국가마다 유약이 달라서 광택의 느낌도 다르거든요.”
그는 한국의 매력으로 양면성을 꼽아요.
“전통과 혁신이 공존하는 게 좋아요. 고층 빌딩 곁에 한옥이 있고, 세계적인 파인다이닝과 노포가 저마다의 생명력을 지닌 채 어우러지죠. 이런 도시가 흔치 않습니다.”
그런데 전통과 혁신의 공존은, 베르나르도의 강점이기도 해요. 1700년대 왕실 찻잔의 복원작부터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전시될 한정판 도자기까지 선보이니까요.
“한국 분들이 지금처럼 혁신을 추구하되, 뿌리를 기억하면 좋겠어요. 5대째 가업을 이어보니 알겠더군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수록, 어디로 나아갈지도 또렷이 보인다’는 걸요.”
베르나르도는 70개가 넘는 국가에 수출하지만, 생산은 오직 리모주에서만 진행해요.
“제품의 완성도를 위해서예요. 베르나르도는 전체 인력의 1/4이 ‘검수’ 전문이에요. 이들이 리모주에 모여있을 때, 우리의 정체성이 더 강력해집니다.”
미셸 회장은 출장으로 넓힌 견문을, 리모주의 본사에 저장해요. 글로벌 트렌드를 직원들과 논의하고, 컬렉션에 반영하죠. 배움을 위해 멀리 나아가되, 한 곳에 축적하는 것. 미셸 회장이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이루는 법’이에요.
Chapter 6.
‘좋은 시간’을 누릴 자격은, 열심히 일해 얻는 것
사람들은 그런 미셸 회장이 베르나르도의 예술성을 강화했다고 평가해요. 장인이 30번 이상 매만지고, 6번을 구워내야 하는 상감Incrustation* 기술을 도입한 이도 미셸 회장이죠.
*도자기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그 속에 같은 모양의 금, 은, 자개 등을 박아 넣는 공예 기법.
미셸 회장이 베르나르도를 이끈 지도 올해로 29년째입니다. 그는 허심탄회하게 말했어요. “선대 덕에 풍족하게 자랐지만, 가업을 이을 생각은 없었다”고.
“아버지께서 한 번도 승계 말씀을 안 하셨거든요. 저는 대학을 나와 건설업에 종사했어요. 파리에서 제 일을 하며 만족했는데, 어느 날 아버지께서 물으시더군요. ‘베르나르도의 세계화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말예요.”
그렇게 1979년, 20대 나이에 가업에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37세일 때, 부모님이 헬기 추락 사고로 세상을 떠나셨어요. 너무나 갑작스러웠죠.
“슬픔에 휩싸인 제게, 할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네가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 상황이 변해도 모든 건 계속돼야만 해’ 설득하셨죠.”
예상보다 이르게 베르나르도의 수장이 된 미셸 회장. 아버지의 바람대로 세계화를 위해 움직입니다.
“저는 1년의 60% 이상을 해외 출장으로 보내요. 호텔과 레스토랑이 저희의 고객이니까, 직접 방문해 식사하며 공부하는 겁니다. ‘어떤 제품이 테이블에 필요할까’ 영감을 구하고, 길거리 음식을 맛보며 트렌드도 파악하죠.”
미셸 회장은 리모주 밖으로 나아간 동시에, 사람들을 리모주로 모았어요. 2003년 베르나르도 재단을 설립해, 방문객들이 1년 내내 도자기 투어를 즐기게끔 프로그램을 마련했죠.
또한 여름마다 리모주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현대 미술가들의 세라믹 작품을 선보였어요. 일부 전시는 파리, 뉴욕, 토론토, 타이베이 등으로 순회했어요. 도자기를 사지 않아도, 누구나 미술관에서 감상하도록 ‘문화 콘텐츠’로 만든 겁니다.
“감사하게도 저는 좋은 집에서 자랐어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열심히 일해야 ‘좋은 시간’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배웠습니다. 다행히도, 일하는 중에도 좋은 시간은 피어나더군요. 오늘처럼 말이죠.”
Chapter 7.
마치며 : 테이블 너머, 라이프스타일로
베르나르도는 ‘6대 경영’을 준비 중입니다. 미셸 회장의 아들 찰스 베르나르도Charles Bernardaud가 가업에 동참했거든요. 찰스는 공장 운영의 총괄자인 동시에, 최고 재무 관리자예요.
“찰스는 과거의 저처럼 다른 회사에서 일하다가, 6년 전 베르나르도의 제품 개발부터 맡았어요. 공학도였기 때문에 3D 모델링 프로그램에 익숙해요.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시뮬레이션하죠.”
미셸 회장이 자리를 비울 수 있는 건, 리모주를 지키는 든든한 아들과 친척들 덕분이에요.
“1대부터 6대까지 저마다 다른 시대를 살았는데, 한 가지는 분명해요. 도자기의 재료는 2000년째 똑같지만, 용도는 무한히 변할 수 있다는 것. 베르나르도는 테이블웨어 너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변신 중입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베르나르도의 도자기 목걸이와 반지, 조명 사진을 보여줬어요.
“지금 제가 착용한 커프 링크스Cuff Links*도 도자기예요. 그릇과 주얼리, 예술품까지… 일가족과 장인들의 노력으로, 베르나르도는 오늘도 성장 중입니다.”
*셔츠의 소매를 여미는 액세서리.
롱블랙 프렌즈 B
지난 주말, 박서보 화백과 베르나르도의 협업 작품을 다시 감상했어요. 순간 박 화백과 함께 제주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올리브 한입에, 와인 한 모금 맛보는 상상을 하게 됐죠.
롱블랙 피플, 오늘은 좋아하는 그릇에 식사하면 어떨까요? ‘좋은 시간’을 위해, 저도 아끼던 찻잔을 꺼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