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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야크 : 히말라야에서 태어난 브랜드, 산악인의 베이스캠프를 꿈꾸다

이 노트는 블랙야크의 지원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브랜디드 콘텐츠, 위드롱블랙을 더 알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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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블랙 프렌즈 B 

주말이면 가끔 북한산에 갑니다. 진관동의 한옥마을을 지나 등산로에 접어들면, 숲이 시작되기 전에 들를만한 공간이 있습니다. 블랙야크 베이스캠프 북한산점. 1층엔 카페와 매장이 있고, 2층은 라운지입니다. 

이 라운지, BAC라는 커뮤니티 회원을 위한 공간입니다. 블랙야크 알파인 클럽Blackyak Alpine Club. 아웃도어 브랜드 블랙야크가 운영하는, 한국에서 가장 큰 온라인 아웃도어 커뮤니티입니다. 2013년 생겼고, 회원 수는 52만 명에 달합니다. 봄·가을이면 등산 인증 사진이 한 달에 20만 건 넘게 올라올 정도예요.

라운지는 아늑했습니다. 나무로 만든 벤치에 앉아 물을 마시거나 지도를 보며 쉴 수 있어요. 산을 오르려는 이들과 내려온 이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문득 블랙야크가 궁금해졌습니다. 산 타는 사람들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모으는 이 브랜드, 무엇을 꿈꾸는 걸까요. 강태선 BYN블랙야크그룹 회장을 북한산에서 만났습니다.


강태선 BYN블랙야크그룹 회장

산악 장비를 만들고 팔아온 지 51년이 됐습니다. 시작은 서울 종로5가의 한 평짜리 가게 ‘동진’사였습니다. 여기서 직접 만든 등산 배낭을 팔았어요.

지금 이 가게는 어떻게 되었냐고요. 한국에 270개, 중국에서 120개, 유럽*에서 12개. 모두 402개의 매장을 가진 아웃도어 브랜드가 되었어요. BYN블랙야크라는 이름으로요.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 폴란드 등 

가게를 시작하던 스물넷에는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냥 산이 좋아서 상경한, 제주 사람이었습니다.

등산과 사업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처음 산을 오를 땐 누구도 정상을 보지 못합니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가며 나타납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오래 갈 수 없습니다.

Chapter 1.
제주 소년, 아버지 대신 산을 의지하며 자라다

저의 뿌리는 한라산에 있습니다. 고향은 제주 서귀포시 예래동. 한라산 자락이 제주 남쪽 바다와 만나는 마을입니다.

저는 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역사엔 이해할 수 없는 비극들이 기록되곤 합니다. 제주 4·3사건이 그랬습니다. 마을에는 저 말고도 아버지 없는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강한 분이셨어요. 종일 밭일을 하셨습니다. 겨울엔 보리, 여름엔 조와 고구마를 키우셨어요. 저는 그 곁에서 놀며 자랐습니다.

산에 눈뜬 건 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체육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 2박 3일 한라산 등반을 떠난 겁니다. 지금처럼 길이 난 산이 아니었어요. 풀을 헤치고, 바닥을 짚어가며 올랐습니다. 가파른 오르막엔 계단을 팠고, 텐트가 없으니 노숙하듯 야영했죠.

그렇게 오른 정상. 본 적 없이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졌어요. 물이 가득 찬 백록담, 그 물에 비친 하늘과 구름… 마음이 벅차오르더군요. 오르며 고생한 건 기억나지 않았어요. 저는 이때부터 산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서울에 올라온 것도 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산악인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히말라야 등반을 앞두고 겨울 한라산에 훈련을 온 겁니다.

서울에서 온 멋진 옷을 입은 남자들, 처음 보는 등반 장비와 처음 듣는 산 이름들.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이들은 “서울에는 산이 100개도 넘는다”고 말했어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넓은 제주에 한라산 하나인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산이 있을까 싶었죠.

스물둘이 되던 1971년. 난생처음 서울에 올라왔습니다.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정말로 산이 그렇게 많은가, 처음엔 2주만 둘러보고 내려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서울을 둘러보고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도시를 둘러싼 산봉우리들, 난생처음 보는 바위산의 풍경. 북한산과 수락산, 도봉산과 관악산을 오르다 2주가 훌쩍 지났습니다. 그렇게 서울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어린 시절의 강태선 회장(왼쪽). 제주에서 자란 그는 서울에서 온 산악인들을 만나며 산의 세계에 빠졌다. ⓒBYN블랙야크

Chapter 2.
길바닥에서 면도칼로 만든 배낭, 종로를 접수하다

세계적인 아웃도어 브랜드는 대부분 산악인이 만들었습니다. 더글라스 톰킨스가 만든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 이본 쉬나드가 세운 파타고니아Patagonia가 대표적이죠. 

저는 그 이유를 알고 있어요. 산을 오르는 사람만 어떤 장비가 필요한지를 압니다. 처음엔 자신이 필요해서 장비를 만듭니다. 

제가 1972년에 등산 배낭을 만든 것도 그래서예요. 처음엔 군용 배낭을 지고 산을 올랐어요. 어깨가 너무 불편하더군요. 내가 고쳐보자, 싶었어요.

동대문 시장에서 튼튼한 원단을 샀어요. 길바닥에서 배낭을 면도칼로 뜯었습니다. 고치고 싶은 부분을 그리고, 시장 골목 수선집에 갔어요. 뜯고 고치고, 뜯고 고치고. 세 번을 하니 배낭이 등에 맞더군요. 아마 한국에서 나온 첫 등산 배낭일 겁니다.

배낭은 반응이 좋았어요. 산 타는 친구들이 “나도 만들어달라” 고들 했으니까요. 종로 5가에 한 평짜리 가게를 냈습니다. 이모부에게 보증금 15만 원을 빌렸어요. ‘동진’이라는 이름은 제가 지은 게 아닙니다. 이전에 장사하던 모자 가게의 간판을 그대로 쓴 겁니다. 그렇게 작게 시작했습니다.

서울로 상경한 강태선 회장은 24살이라는 나이에 등산 장비 가게 ‘동진’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BYN블랙야크

가게가 처음부터 잘되지는 않았습니다. 산에 가는 사람도, 산을 위한 제품도, 자연히 시장도 없었죠. 저는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주말엔 산을 타고 주중엔 레저용품을 팔면서요. 나중엔 텐트와 침낭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1980년대, 등산용품 시장이 날개를 달기 시작했어요. 1977년 고상돈 대원이 한국 최초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하면서였어요. 이후 아시안게임과 서울 올림픽이 불을 붙였죠. 아웃도어 특수가 시작된 겁니다. 종로 5가 ‘동진레저’는 가장 북적이는 등산용품 가게였어요. 오래 산악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제 가게를 사랑방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았죠. 

시장이 커지자 고민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아웃도어 브랜드들이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한 거예요. 큰 브랜드 여럿이 연락을 해왔습니다. “우리 브랜드를 수입 유통하면 어떻겠느냐”는 거였어요.

그 제안을 받았어도 돈은 벌었을 겁니다. 시장이 그만큼 떴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제 것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청업체나 유통업체로 남고 싶지 않았어요. 

한국만큼 제조 기술이 좋은 나라는 없잖아요. 저는 누구보다 산을 잘 알고요.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동진’의 첫 브랜드인 ‘자이언트’. 한국인의 체형에 맞는 등산 배낭은 물론, 텐트나 침낭 등 다양한 제품군을 확장하며 성황을 이뤘다. ⓒBYN블랙야크

Chapter 3.
사업으로 다친 마음, ‘히말라야 치료’로 극복하다

블랙야크는 히말라야에서 태어난 브랜드입니다. 1993년 여름, 저는 엄홍길과 함께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었어요.

쓰린 마음으로 찾은 산이었습니다. 사업은 크게 휘청이고 있었습니다. 1991년 산에서 취사와 야영이 전면 금지됐습니다. 등산용품 시장에 날벼락이 친 셈이에요. 60명 넘던 직원을 20명으로 줄였습니다. 쉬고 싶었습니다. 모든 걸 미뤄두고 히말라야로 떠났습니다. 

초오유와 시샤팡마를 오르는 3개월의 원정. 이 원정은 제게 두 가지 깨우침을 줬습니다.

우선 고민을 내려놓는 법을 배웠습니다. 서울에서 골치를 썩이던 고민은 히말라야에 가면 사라집니다. 물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고산병 때문에 숨쉬기가 어렵고, 눈이 휘몰아쳐 한발 내딛기도 두렵습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안고 있던 고민은 너무 작게 느껴집니다. 여기서 살아만 가면 그 정도 어려움은 기쁘게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자연히 길게 사업을 보게 됩니다. 히말라야에서 돌아보면 사업을 하던 내 모습이 우습게 느껴집니다. 무슨 욕심으로 그렇게 서둘렀나, 그걸 왜 끝까지 이기려고 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을 꾸준히 하면 되는 건데’라는 당연한 진리를 되새기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저는 이걸 ‘히말라야 치료’라고 부릅니다. 히말라야에서 딱 한 달만 지내도 이 치료가 끝납니다. 1993년부터 지금까지 히말라야를 서른 번 넘게 찾은 건 그래서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에너지를 얻고 돌아오는 겁니다. 올해도 3월에 히말라야를 다녀왔습니다. 

블랙야크가 히말라야에서 태어났다는 건 그런 의미입니다. 시장이 어려워도, 저는 아웃도어 브랜드를 계속 만들고 싶었습니다. 세계에서 인정받는 브랜드가 한국에 있길 바랐습니다. 다만 장비 시장이 축소되니 의류 중심으로 가야 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에 잠겨 티베트 산길을 걷던 제게 야크가 보이더군요. 티베트에서 야크는 소중한 동물입니다. 베이스캠프까지 물자를 날라줘서, 산악인들은 ‘셰르파의 셰르파’라고도 부릅니다. 억세고 검은 털, 강인한 뿔과 근육. 하지만 순하고 초롱초롱한 눈동자. 

그렇게 히말라야에서 새 브랜드의 이름이 결정됐습니다.

1991년 사업이 어려워지자 히말라야로 떠난 강태선 회장. 당시 그는 ‘셰르파의 셰르파’라 불리는 야크를 보며, ‘블랙야크’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었다. ⓒBYN블랙야크

Chapter 4.
ESG : 산을 사랑한다면, 진심일 수밖에

내리막 뒤엔 또 오르막이 찾아옵니다. 아웃도어 시장은 2000년 전후로 대호황을 맞습니다.

아웃도어 붐의 한복판에 블랙야크가 있었던 건 오랜 인연 덕분입니다. 엄홍길 대장의 초창기 원정을 함께했고, 오은선·김미곤 대장의 히말라야 완등 순간을 후원했죠. 산악인들이 조명을 받을 때는 늘 블랙야크의 로고가 함께했습니다.

어떤 스포츠 브랜드건 선수들 사이에서 먼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갑니다. ‘블랙야크가 진심이다’, ‘블랙야크가 최고다’라는 평가는 단시간에 얻어낼 수 없습니다. 

저는 1978년에 거봉산악회를 창립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습니다. 엄홍길·홍종철·홍영길을 포함해 한국 대표 산악인들과 함께했습니다.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전문 산악인의 입지가 커져야 등산 인구도 늘어납니다. 히말라야 등정 소식이 퍼지면 북한산을 찾는 이도 많아집니다.

‘블랙야크가 진심이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 또 다른 분야가 있었습니다. 환경입니다. 2000년대 들어 중국 만리장성과 히말라야의 쓰레기를 수거하는 캠페인을 벌여왔습니다. 

2014년엔 나우nau라는 미국의 친환경 의류 브랜드를 인수했습니다. 2020년 국내 최초로 ‘국내’ 폐페트병 자원 순환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전까진 모든 브랜드가 해외 폐페트병을 들여와 섬유로 재활용했거든요.

두 사업 모두 여태 수익을 내지는 못합니다. 나우의 인수가 실패였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합니다.

50년 넘게 사업을 하면서 제가 배운 게 있습니다. 때로 시간이 오래 걸려도 닿아야 할 곳엔 언젠가 닿게 됩니다. 친환경 의류라는 커다란 흐름이 역행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다리면 됩니다. 기다림에 필요한 게 진심입니다. ‘이 방향이 맞다’, ‘이 방향이 좋다’는 생각이 진심입니다. 그게 없으면 기다릴 수 없습니다.

모든 일에서 돈을 벌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업이 의미가 있지도 않습니다.

블랙야크는 산의 쓰레기를 치우는 ‘클린마운틴 365’ 캠페인을 2013년 시작했다. 만리장성과 히말라야의 쓰레기 수거 캠페인도 벌였다. ⓒBYN블랙야크

Chapter 5.
산도 사람도, 베이스캠프가 필요하다

문화를 키우면 사업이 따라옵니다. BAC, 블랙야크 알파인 클럽은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BAC는 2013년 출발했습니다. 시작은 ‘명산40 도전’이었습니다. 블랙야크 익스트림팀의 김정배 이사가 이 도전에 함께했습니다. 

김정배도 산 사람입니다. 엄홍길이 네팔 오지에 학교 짓는 일을 돕던 친구였습니다. 그 일을 그만뒀기에 나를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산을 알고 산을 즐기는 사람이 문화를 만들 수 있으니까요. 

산악회를 40년 넘게 운영한 나입니다. 회사가 여는 등반 모임에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한번 행사에 많아야 수백 명이 모입니다. 주말마다 산을 누볐지만, 모임이 확산하지 않았습니다. 구심점이 분명한 모임은 들불처럼 퍼질 수가 없습니다.

회사는 판만 깔아주고 등산객들이 서로 만나게 하는 것. 그게 BAC의 구상입니다. 이 커뮤니티에서 회원들은 함께 산을 탈 사람들을 만납니다. 저희가 지정한 명산을 함께 오르고 사진으로 인증합니다. 2024년 8월 말 기준으로 52만 명이 4287개의 클럽을 만들었습니다. 

그럼 이들에게 BAC는 무엇일까요? 베이스캠프라고 생각합니다. 근거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쉬면서 충전할 수 있는 곳.

베이스캠프의 소중함을 저는 히말라야에서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캄캄한 암흑천지에서 베이스캠프의 노란 불빛을 보면 안도의 한숨이 나오곤 했습니다.

2019년 사명을 BYN블랙야크로 바꿨습니다. 새로운 삶의 베이스캠프Basecamp in Your New life

산을 오르는 이들에게 블랙야크가 베이스캠프이길 바랍니다. 혼자 산에 오르는 것이 두렵거나 막막하거나 외로울 때, 찾고 싶은 곳이길 바랍니다.

블랙야크 베이스캠프 북한산점. 등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인 베이스캠프를 만들었다. 올해에는 북한산을 비롯해 지리산, 청계산까지 총 3곳의 베이스캠프를 선보였다. ⓒBYN블랙야크

Chapter 6.
경영이란, 버티는 것

10년 전, 모두가 등산복만 입고 다니던 때가 있었습니다. 회사나 결혼식에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블랙야크의 매출이 그때에 미치지 못하는 걸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등산 문화는 갈수록 확산하고 있습니다. BAC 회원의 절반 이상은 20대와 30대입니다. 환경과 건강이 소중한 걸 아는 멋진 사람들입니다. 이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있는 한, 아웃도어 시장이 작아질 수는 없습니다.

저는 바위산을 보며 블랙야크의 미래를 상상합니다. 깎아지른 바위에도 나무와 풀이 자라납니다. 바위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눈과 바람을 견디며 버티고 서있습니다. 

이 회사가 지난 50년을 그랬듯이, 앞으로 50년도 그렇게 버티길 소망합니다. 패션 회사가 아니라 산악 장비 회사라는 것을 기억하면서요.

51년간 블랙야크를 이끌어 온 강태선 회장. 70대 후반의 그는 올해 3월에도 히말라야 등반을 다녀왔다. ⓒ롱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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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실 블랙야크의 역사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강태선 회장이 산에 쏟은 애정을 들으니, 블랙야크가 미국의 아웃도어 브랜드보다 깊이가 덜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열흘 전에 블랙야크의 베이스캠프가 또 하나 문을 열었습니다. 서울 원지동에 들어선 블랙야크 베이스캠프 청계산점입니다. BAC 회원을 위한 2층 라운지를 둘러봤어요. 코르크 소재의 외벽부터 원목 소재의 가구까지, 따뜻한 느낌의 공간입니다. 초가을, 청계산 나들이 계획하고 계신다면 한번 들러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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