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롱블랙 프렌즈 K
‘내가 걷는 이 길이 옳은 길일까’ 고민 중인 분들은, 오늘의 노트를 꼭 읽어보세요.
지구 스무 바퀴를 헤매며, ‘아무도 닦아놓지 않은 길’을 걷는 사람을 만났거든요. 김태영 로케이션 매니저. 영화 「타짜」부터 「추격자」, 「아저씨」, 「내부자들」까지. 한국 영화의 굵직한 장면들이 그의 발끝에서 나왔죠.
로케이션 매니저라는 직업, 생소하시죠? 영화나 드라마, 광고의 배경으로 삼을 공간을 찾아낸 뒤 촬영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사람이에요. 흔히 ‘영화 제작의 나침반’이라고도 부릅니다.
김태영 매니저는 이 직업을 국내 최초로 전문화한 사람이에요. 22년간 약 3500여 편의 영상물에 참여하며, 단순한 장소 섭외자로 취급받던 직업을 ‘한국 제일의 공간 전문가’로 만들었죠. 지금은 BTS부터 NC소프트, 문체부까지 그에게 공간 자문을 구하는 중입니다.

김태영 로케이션 매니저・로케이션 플러스 대표
‘최전방의 전투 요원.’ 김태영 매니저는 자신과 동료들을 이렇게 불러요.
새벽 3시 폐건물의 으스스함을 직접 느끼러 가고, 현장에선 취객과 싸우다 소송에 휘말리고, 들개에게 물릴 위기만 수십 번을 겪었거든요. 왜 이렇게까지 할까요? 그의 대답은 명쾌합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만 ‘나만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안개가 자욱한 길을 가장 먼저 뚫고 가는 사람만이 역사에 남는다고 생각해요.”
김 매니저는 ‘나만의 성취’를 얻기 위한 고군분투기를 3시간 동안 담담히 들려줬습니다. 흙먼지와 눅눅한 기름, 피비린내가 섞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왠지 모를 용기를 얻었죠. 여러분도 함께 느껴보실래요?
Chapter 1.
아버지가 물려준 니콘 카메라
로케이션 매니저는 남다른 ‘포착 감각’을 가져야 합니다. 같은 공간에 가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 걸 밝혀내야 하죠. 그 공간만이 품은 색이나 질감, 밝기 같은 것들이요.
다행히 김태영 매니저는 어려서부터 그 감각을 길러왔어요. 1972년 강원도 동해시에서 태어나, 집 대신 자연을 하루 종일 누비며 자랐거든요. 예인선* 기관사인 아버지 덕에 바다와 배 구경도 실컷 했고요.
*다른 배를 밀거나 끌어서 조종하는 선박. 주로 붐비는 항구나 좁은 수로의 배를 예인한다.
그가 사진에 빠져든 건 열네 살 무렵. 아버지가 자신의 니콘 카메라를 물려준 거예요. 처음엔 취미로 시작했지만, 훗날 사진학과에 들어가 기술을 익혀나갔죠. 원래 다니던 기계공학과를 그만두면서까지요.
“사진은 뺄셈의 예술이에요. 세상의 모든 풍경 중,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프레임 밖으로 덜어내니까요. 그리고 그 장면을 어떤 빛이나 구도로 담아내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죠.”
하지만 김 매니저는 동기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걸었어요. 다들 졸업 후 공기업의 사진 팀장이나 신문사 사진 기자가 됐지만, 그는 당시 이름도 생소한 ‘로케이션 매니저’가 되기로 한 거예요.
“처음엔 사진 스튜디오를 준비했지만 잘 안됐어요. 제 길이 아니었던 거죠. 그런데 우연히 친구로부터 ‘사진에 맥락을 넣는 직업’을 알게 된 거예요. 그게 로케이션 매니저였죠. 한국 영화계에선 ‘섭외부장’ 정도로 불렸는데, 해외에선 좀 더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직업으로 인정받고 있었어요.”
김 매니저는 확신했어요.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사진 찍으러 전국을 누비며 공간 경험을 쌓았으니, 영화나 광고 제작자가 원하는 분위기의 공간을 찾아주는 건 일도 아니라 본 거죠. 그렇게 2002년, 그는 동기 두 명과 함께 국내 최초의 로케이션 전문 회사 ‘로케이션 플러스’를 세웠습니다.

Chapter 2.
의도를 파헤치는 탐정, 로케이션 매니저
없는 시장을 뚫었는데, 일감이 들어올 리 없었겠죠. 당시만 해도 장소 섭외는 조감독이 지도책을 들고 2주간 전국을 다니는 게 보통이었으니까요. 휴일을 반납하고, 체력을 태워가면서요. 비효율적이었죠.
이틈을 타 김태영 매니저는 자신의 ‘가능성’을 주변에 뿌렸어요. 코엑스부터 올림픽 공원 전경, 석양으로 물든 한강공원 등을 영상으로 담은 뒤, CD에 구워 전국의 모든 영상 프로덕션에 보낸 거예요.
가까스로 잡은 첫 로케이션 프로젝트, 바로 2002년 8월에 선보인 SK 엔크린 주유소 광고였습니다. 감독의 요구사항은 난해했어요. “주유소 뒤로 탁 트인 도심의 스카이라인이 보이면 좋겠다.”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어요. 보통 주유소는 도로변에 있고, 스카이라인은 멀리 있거나 다른 건물에 가려지니까요. 발로 뛴다고 찾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죠. 하지만 김 대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때 생각했어요. 이 일은 의뢰인의 요구를 잘 듣는 게 정답이 아니다. 요구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핵심일 거라고요. 주유소를 찾을 수 없다면, 도심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주유소를 세우기로 했죠.”
김 매니저는 양재 시민의 숲 주차장을 찾아냈어요. 높은 언덕배기에 있어, 뒤로 타워팰리스 같은 고층빌딩과 도심 실루엣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죠. 여기에 주유기를 가져와 설치하니 감독이 원하는 장면이 완성된 거예요.
그 뒤로 영상 업계에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로케이션 매니저라는 사람이 있는데, 장소 찾는 귀찮은 일을 기대 이상으로 해낸다”고요. 의뢰가 다달이 늘어, 연 40~50여 건의 프로젝트를 소화하기에 이르렀죠.
“이제 막 시작했던 때이지만, 왠지 모를 해방감이 있었어요. 맨 처음 이 일을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전부 ‘고생스러운 일을 뭐 하러 하냐’며 혀를 찼거든요. 의사나 판사가 직업적 성취의 왕도인 이곳에서, 돈도 학력도 혈연도 없이 ‘내가 잘하는 일’만으로 존재감을 알렸다는 게 무척 기뻤습니다.”

Chapter 3.
1초의 찰나를 위해 600곳을 벼리다
의도를 밝히는 김태영 매니저의 감각은, 영화판에서 더욱 빛났습니다. 2006년 영화 「타짜」를 시작으로 약 열 편의 영화 로케이션에 참여했죠. 한 편에 약 60~70곳의 장소가 필요하면, 그의 열 배에 달하는 600~700곳을 다니며 선별하는 식으로요.
더 중요한 건 그 공간이 품은 ‘이야기’를 읽어내는 해석력입니다. 그는 영화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대본의 빈틈’을 파고들어, 감독을 항상 놀라게 했어요. 그는 몇 가지 기억을 떠올렸죠.
타짜 : 화투에 숨은 ‘맥락’을 살리다
가령 「타짜」에선 주인공인 도박꾼 고니(조승우)가 스승 ‘평경장(백윤식)’에게 화투를 배우는 집을 찾아야 했어요. 하지만 대본엔 그저 ‘잘 지어진 한옥’이라고만 적혀 있었죠.
그런데 김 매니저가 찾은 곳은 180도 달랐습니다. 군산 신흥동의 적산가옥* 단지였어요. 1899년 개항 이후 일본인들이 무리 지어 살던 곳이었죠. 이유가 뭘까요?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며,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에 매각된 일본인 소유의 주택.
“평경장은 고스톱, 즉 일본에서 건너온 화투를 치는 사람이잖아요. 그럼 전형적인 조선식 한옥보다, 일본식 가옥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다다미 바닥에 앉아 화투를 치는 백윤식 선생을 상상하곤 ‘이거다!’ 싶었죠.”

아저씨 : 원빈의 시선을 따라가다
「아저씨」에선 ‘가장 고립된 공간’을 찾아야 했습니다. 어린 소녀 소미(김새론)가 납치되어도 찾기 힘든, 미로 같은 동네 말이죠. 김 매니저가 찾은 곳은 부산 범일동의 매축지 마을이었어요. 차를 몰고 부산의 고가도로를 내려오던 중 발견했죠.
“차선을 바꾸려고 사이드미러를 보는데, 1초도 안 되는 순간 어두운 골목이 지나갔어요. 갓길에 차를 세우고 골목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개미굴 같은 쪽방촌이 펼쳐졌죠. 알고 보니 6·25 이후 피난민이 모여 군락을 이루던 곳이 지금까지 모습을 유지한 거였어요.”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4층 높이의 건물 꼭대기에 올라, 밤이 될 때까지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내려다봤죠. 스스로 주인공 차태식(원빈)에 빙의해서요.
“차태식은 전직 특수요원 출신이에요. 누군가에게 쫓기거나 누군갈 감시할 때, 가장 유리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했죠. 덕분에 제가 찾은 건물은, 주인공의 은신처인 ‘전당포’가 됐습니다.”

추격자 : 관객의 공포감을 먼저 느끼다
필요하면 현장에 직접 살아보기도 합니다. 「추격자」 속 골목 도주 씬이 그렇게 나왔어요. 형사 엄중호(김윤석)가 도망치는 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을 쫓아 달리는 장면이죠.
이 장면을 위해, 김 매니저는 서울 북아현동의 재개발 구역을 밤새 걸었어요. 새벽 내내 폐건물에 머물러도 보고, 가파른 계단과 좁은 골목을 직접 뛰며 범인과 형사의 호흡을 느껴본 겁니다. 덕분에 아현동 골목은 한국 영화 역사상 ‘가장 긴박한 추격전의 무대’가 됐죠.
“단순히 추격하기 좋은 길을 찾은 게 아니에요. 관객이 스크린만 봐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죠. 그러려면 제가 가장 먼저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해요.”

Chapter 4.
불확실성을 끌어안아야 프로다
로케이션 매니저의 일은 ‘공간을 찾아내는 일’에서 끝나지 않아요. 공간의 주인부터 근처 주민들의 협조까지 받아내야 완성이죠. 그곳이 산기슭이든, 폐공장이든 말이에요.
대부분은 “여기 주인이 누구시죠?”, “시간당 얼마예요?”라며 빠르게 협조를 구하려 합니다. 하지만 김태영 매니저는 그런 방법이 ‘오해’를 부른다고 말해요. 시간과 노력을 더 들여서라도, ‘공간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덧붙이죠.
“카페를 빌리고 싶으면,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사장님의 표정과 몸짓을 살피다, 조용히 다가가 이야기하죠.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요. 이 공간을 조금 더 즐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기도 하고요.
그럼 사장님이 저절로 이야기를 쏟아내세요. 사실은 내가 독일에서 살다 왔다, 이곳의 창문은 모두 독일에서 들여왔다. 단열이 잘 돼 커피의 온기와 냄새, 밀도를 카페에 가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면서요. 어느새 말동무가 되어있으면, 그때 명함을 드린 뒤 빠르게 일을 시작하죠.”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철저히 해도, 촬영장에선 늘 변수가 일어나기 마련이에요. 갑자기 쏟아지는 폭우, 약속을 번복하는 주인, 느닷없이 나타난 괴한까지요.
“한번은 촬영장에 술 취한 사람이 난동을 부렸어요. 그런데 70명의 스태프가 전부 저만 쳐다봤죠. 제가 이 촬영장의 책임자라는 거예요. 억울하죠. 그런데 ‘엄마, 나 어떡해’ 할 순 없잖아요. 제가 어떻게든 중재해서 돌려보냈죠. 혹여나 맞아 죽진 않을까 걱정하면서도요.”
김 매니저는 강조합니다. 이런 불확실성마저 다룰 줄 아는 태도가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른다고요.
“사실 어떤 일이든 그래요. 왜 내 일만 유독 힘들까, 나한테만 이런 사건이 터질까 한탄하면 일도, 인생도 진행될 수 없어요. 없다가도 일어나는 게 변수예요. 오늘 출근했는데 당황스러운 일이 터질 수도 있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럼에도 해낸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해 줘요. 전 그걸 믿고 위험을 감수하는 거예요.”
로케이션 매니저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김 매니저에게 일을 배우려는 사람도 많아졌다고 해요. 하지만 이 직업은 국내에 100여 명이 채 안 됩니다. 그만큼 꾸준히 일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죠.
“1년 365일 여행하는 직업 정도로 생각하고 오시는 분이 많아요. 막상 일이 힘들고 복잡하니 석 달 만에 관두기도 하죠. 저로선 채용난이 극심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만큼 근성과 추진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에요. 그런데 다른 일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버티는 힘이 있어야 ‘내 현장’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와 이야길 하다 보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뻔한 격언이 떠올랐어요. 김 매니저는 “시간이 촉박한 의뢰일수록 짜릿하다”고 덧붙였거든요.
“다른 사람한테 다 맡겨봤는데, 아무도 못 하니까 끝내 제게 일이 온 거겠죠. 응급 수술을 해낼 적임자라 생각했을 테니까요. 저는 그럴수록 더 신나요. 제가 판을 주도할 기회가 더 늘어나니까요.”

Chapter 5.
기술이 나를 위협한다? 추월차선을 찾아라
최근 영상 업계엔 거대한 변화가 닥쳤습니다. ‘버추얼 프로덕션Virtual Production’의 등장이죠.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는 배경은 CG로 만들고, 심지어 배우까지 AI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어요.
“후배들이 걱정해요. ‘형, 이제 우리 굶어 죽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기존 방식대로 일하면 일감은 50% 넘게 줄어들 겁니다. 그럼 ‘아이고, 내 일터가 5평에서 3평으로 줄었네, 다음엔 죽어야겠네’ 하고 목 놓아 울 순 없죠. 이렇게 생각해 보는 거예요. ‘내 역량이 미래에 어떤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하고요.”
이미 그는 10년 전부터 변화의 속도에 보폭을 맞추고 있어요. 15년간 로케이션을 다니며 모은 130만 장의 공간 데이터를 활용해, 2015년 촬영 장소를 대관하는 플랫폼 ‘로케이션 마켓’을 연 거예요.
“내가 가진 경쟁력을 120% 활용한 셈이죠. 사람들이 원하는 공간과, 제가 찾아둔 공간을 서로 이어주는 일이요. 단지 빌려주는 일만 하지 않아요. 고객이 원하는 장면을 말해주면, 저희가 나서서 찾아주고 준비까지 해줄 수도 있죠. 스턴트 배우도 섭외하고, 앰뷸런스도 대기 시켜주는 식으로요.”
지금 로케이션 마켓은 콘텐츠 제작자의 ‘필수 도구’가 됐어요. 2023년 넷플릭스에서 국내 공개한 오리지널 작품 중, 무려 58%가 이곳을 통해 촬영 장소를 섭외했죠.

공간에 이야기를 입혀 ‘IP 유산’을 만들다
여기서 끝나지 않아요. 이제 김 매니저는 자신을 ‘공간 유산 기획자’라 부릅니다. 한국의 매력적인 로컬 공간을, 글로벌 콘텐츠로 포장해 수출하는 작업에 들어갔죠.
“가까운 미래엔 이야기가 깃든 공간이 지식재산권(IP)으로 인정받을 거예요.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와 김고은이 만난 주문진 방파제, BTS가 다녀간 용산의 떡볶이집은 단순히 ‘갈 만한 곳’이 아니에요. 전 세계 팬이 찾아오는 성지이자, 한국을 다루는 콘텐츠의 배경이 될 만한 아이템이죠.”
그래서 그는 부지런히 장소를 ‘스캐닝’하는 중입니다. 라이다LiDAR 센서로 공간을 3차원 데이터로 만들어, 이를 ‘디지털 에셋Digital Asset’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죠. 최근엔 서울 광화문 일대부터 국회의사당, 인천공항을 에셋으로 만드는 중입니다. 배우가 장소에 직접 갈 필요 없는 촬영 환경을 위해서요.
“자신의 업을 재정의할 때가 온 것 같아요. 100명이 1억 시장을 놓고 싸우는 레드오션에서 1등하려고 아등바등하지 마세요. 아무도 안 가는 옆 차선으로 핸들을 꺾으면, 그곳이 바로 무주공산입니다. 거기서 깃발을 새로 꽂으면 내가 곧 ‘룰 메이커’가 되는 거예요.”

Chapter 6.
땅이 기울어지면, 내 무게중심을 옮겨라
‘세상은 날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김태영 매니저는 22년간 거친 현장을 누비며, 냉혹하지만 분명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세상은 내게 너무 가혹하다’며 몸을 웅크리면 웅크릴수록, 고통받는 건 오직 자신 뿐이었죠.
“7~8년 전에 번아웃이 왔어요. 이 일을 하려면 돈도, 체력도 많이 드는데. 권한보다 책임이 더 크고,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했죠. 아내는 차라리 LA 한인타운에 있는 처형의 식당에서 일하며 여생을 보내자고 했고요.
그러기로 마음을 정리하는데, 여든 넘으신 부모님의 한마디가 제 뒤통수를 쾅 때렸어요. ‘우리가 다 죽고 가면 안 되겠니?’ 하고 조심스레 말리신 거죠. 부모님도, 나도 삶이 이토록 유한한데. 왜 도피하려고 했을까. 이왕 선택한 일, 좀 더 재밌게 살아보기로 단단히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세상은 원래 모질지만, 이것 역시 즐기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는 걸요.
“살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확신은 ‘우린 언젠가 죽는다’는 것뿐이에요. 그 외의 모든 것이 불확실하죠. 달리 말하면 정해진 운명은 없다는 것이고요. 이걸 깨달았는데 주저할 시간이 어딨나요.”
세상은 늘 불확실합니다. 코로나가 터지고, AI가 등장하고, 오늘의 트렌드는 내일 사라지죠. 그럴수록 김 대표는 조언합니다. “땅이 기울어지는 걸 탓하기보다, 내 무게중심을 옮겨보자”고요.
“영화 촬영이 줄면 드라마를 하고, 드라마가 줄면 예능을 했습니다. 오프라인이 막히면 디지털 에셋을 팔아왔죠.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거예요. 두 다리로 자전거 페달을 밟아야만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요.”
김 대표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 루트’를 기획하던 때를 떠올립니다. 그리스에서 채화된 불꽃이 평창까지 오는 긴 여정. 가장 중요한 미션은 단 하나였죠. ‘꺼뜨리지 않기’요.
“비바람이 몰아쳐도 성화는 꺼지면 안 돼요.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나를 무시하고, 거절하고, 상처 입혀도 내 안의 ‘열정’이라는 불씨만 살아있으면 됩니다. 그럼 내일 다 망해도, 모레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롱블랙 프렌즈 K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는 김태영 매니저의 생각법. 쉽진 않겠지만, 마음속에 담아두려고 해요. 언젠가 위기를 맞닥뜨려야 할 때, 포기 대신 우회를 선택할 수 있도록요. 김 매니저에게서 배울 점을 세 가지로 정리해 봤어요.
1. 요구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그 안에 숨은 맥락을 해석할 때 대체 불가능한 기획이 나온다.
2. 내 직업이 불안하다면, 차선을 바꿔라. 내가 쌓은 경쟁력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
3. 내가 있어야 세상도 있다. 내가 쪼그라들면 세상도 쪼그라든다.
이제 올해도 열흘이 채 남지 않았어요. 한껏 들뜬 연말 분위기 속에서도, 여전히 ‘이 길이 맞는 걸까’ 고민 중일지 모를 롱블랙 피플에게 오늘의 노트를 바칩니다.

롱블랙 프렌즈 K
‘내가 걷는 이 길이 옳은 길일까’ 고민 중인 분들은, 오늘의 노트를 꼭 읽어보세요.
지구 스무 바퀴를 헤매며, ‘아무도 닦아놓지 않은 길’을 걷는 사람을 만났거든요. 김태영 로케이션 매니저. 영화 「타짜」부터 「추격자」, 「아저씨」, 「내부자들」까지. 한국 영화의 굵직한 장면들이 그의 발끝에서 나왔죠.
로케이션 매니저라는 직업, 생소하시죠? 영화나 드라마, 광고의 배경으로 삼을 공간을 찾아낸 뒤 촬영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사람이에요. 흔히 ‘영화 제작의 나침반’이라고도 부릅니다.
김태영 매니저는 이 직업을 국내 최초로 전문화한 사람이에요. 22년간 약 3500여 편의 영상물에 참여하며, 단순한 장소 섭외자로 취급받던 직업을 ‘한국 제일의 공간 전문가’로 만들었죠. 지금은 BTS부터 NC소프트, 문체부까지 그에게 공간 자문을 구하는 중입니다.

김태영 로케이션 매니저・로케이션 플러스 대표
‘최전방의 전투 요원.’ 김태영 매니저는 자신과 동료들을 이렇게 불러요.
새벽 3시 폐건물의 으스스함을 직접 느끼러 가고, 현장에선 취객과 싸우다 소송에 휘말리고, 들개에게 물릴 위기만 수십 번을 겪었거든요. 왜 이렇게까지 할까요? 그의 대답은 명쾌합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만 ‘나만의 성취’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안개가 자욱한 길을 가장 먼저 뚫고 가는 사람만이 역사에 남는다고 생각해요.”
김 매니저는 ‘나만의 성취’를 얻기 위한 고군분투기를 3시간 동안 담담히 들려줬습니다. 흙먼지와 눅눅한 기름, 피비린내가 섞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왠지 모를 용기를 얻었죠. 여러분도 함께 느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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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매니저의 사무실. 그가 로케이션 매니지먼트를 위해 모은 자료들이 서재에 빼곡하게 꽂혀있다. 그는 22년 동안 약 3000편의 영상 콘텐츠에 로케이션 매니저로 참여했다. Ⓒ롱블랙
그가 로케이션 매니징을 맡았던 영화들. 「타짜」부터 「추격자」, 「아저씨」, 「내부자들」, 최근엔 「밀수」까지 장소 섭외를 맡았다. 편당 많게는 70곳의 장소를 찾는다. Ⓒ롱블랙
김태영 매니저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보여주는 중이다. 같은 공간이라도, 빛의 양과 카메라의 구도 등에 따라 180도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롱블랙
김태영 매니저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선박 나침반. 예인선 항해사였던 아버지의 배에서 가져왔다. 로케이션 매니저라는 직업 역시 ‘영상물 제작의 나침반’이라 불린다. Ⓒ롱블랙
「타짜」는 김태영 매니저의 첫 영화 로케이션 참여 작품이다. 화면은 불법 도박판이 벌어지는 산꼭대기의 비닐하우스. 경찰이 쉽게 찾지 못하는 공간 컨셉을 찾아내느라 전국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CJENM
「타짜」의 한 장면. 불법 도박장이 열린 비닐하우스에 경찰이 들이닥치자, 도박꾼들이 빠져나오고 있다. ⒸCJENM
「아저씨」의 지하 주차장 총격 장면. 김태영 매니저는 평범한 주차장 대신, 긴장감이 맴도는 공간을 찾기 위해 전국을 헤맸다. 그는 “장면의 뉘앙스를 장소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가 영상의 완성도를 결정한다”고 말한다. ⒸCJENM
「내부자들」에서 주인공 우장훈 검사의 본가로 나오는 헌책방. 실제 장소는 단양에 위치한 새한서점이었으나, 2024년 화재로 전소했다. Ⓒ쇼박스
2020년 인천국제공항을 무대로 활용한 BTS의 빌보드 뮤직 어워드 공연. 당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출국이 어려워지자, 김태영 매니저가 장소 섭외 임무를 맡아 두 달의 설득 끝에 섭외했다. ⒸHYBE
로케이션을 위해 산을 누비는 김태영 매니저. Ⓒ김태영
김태영 매니저가 사진으로 담은 풍경. 그는 빛과 구도에 따라 같은 장소도 180도 달라질 수 있으며, 이러한 차이를 의뢰인에게 설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김태영
김태영 로케이션 매니저는 이제 한국의 매력적인 공간을 디지털 자산화하는 데에 앞장서는 중이다. 자신의 회사를 ‘K-컬처 공간유산 기록본부’라고 부르는 이유다. Ⓒ롱블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