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플의 발견 3부 : 재스퍼 모리슨, 30년을 써도 질리지 않는 물건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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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블랙 프렌즈 B 

마음이 복잡할 때 찾아가는 동네 카페가 있습니다. 원목을 덧댄 창틀과 손때가 탄 회벽, 흰색 테이블이 단정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죠.

하루는 이 카페에 앉아 생각했습니다. 왜 어떤 공간은 유난히 심플한 느낌이 나는 걸까, 하고요. 물건이 적은 것도 아닙니다. 컵과 접시, 의자와 조명. 있을 건 다 있어요. 색깔도 다 제각각이고요. 그런데도 공간이 복잡해보이지 않아요. 그 비밀을 저는 끝내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답을 평생 파고든 산업 디자이너가 있더군요.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 그는 20년 전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와 함께 ‘슈퍼 노멀Super Normal’이라는 화두를 제시했어요.

슈퍼 노멀. 아주 평범한 것의 특별함을 파고들다 보면 심플함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런던의 재스퍼 모리슨과 서면으로 대화를 주고받았습니다. 또 30년 넘게 모리슨의 물건을 수집해 온 김성곤 서울시립대 디자인학과 교수와 그 의미를 다시 토론했어요.


김성곤 서울시립대 디자인학과 교수

저는 재스퍼 모리슨의 물건을 마흔 개 넘게 가지고 있습니다. 알레시Alessi의 와인잔, 무지Muji의 시계, 라미LAMY의 만년필, 마지스Magis의 와인랙…

전 컬렉터가 아닙니다. 모셔두려고 산 물건은 하나도 없어요. 30년 전 산 와인랙엔 지금도 와인병이 꽂혀있고, 와인잔으로는 지금도 와인을 마십니다. 신기한 건 이 물건들은 아무리 오래 써도 질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질리지 않는 물건. 저는 그게 심플함의 정체라고 생각합니다. 재스퍼 모리슨이 그토록 강조했던 ‘슈퍼 노멀’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모리슨과 롱블랙 간의 대화를 함께 살펴볼까요.

Chapter 1.
화려함의 시대를 반대로 걸은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을 처음 알게 된 건 1990년대 중반입니다. 제가 다니던 런던의 왕립예술학교RCA* 화방에서 독특한 와인랙을 발견했어요. 반투명 플라스틱 소재에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모양. 홀린듯 구매했어요. 지금도 쓰고 있는 제품이죠.
*Royal College of Art. 영국의 가장 오래된 디자인 교육기관. 재스퍼 모리슨도 이곳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그 무렵 모리슨의 초창기 작품집을 샀는데, 거기서 플라이우드 체어Plywood Chair를 보고 또 마음을 뺏겼습니다. 자작나무 합판plywood. 유럽에서 가장 값싼 축의 목재죠. 그 평범한 재료로 누구나 “의자를 그려보라”고 하면 그릴 법한 단순한 선의 의자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등받이와 다리의 각도가 아주 미묘하게 세련됐고요.

재스퍼 모리슨의 초창기 대표작 플라이우드 체어. 당시 유행이었던 화려한 디자인과 달리,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낸 단순한 형태가 특징이다. ©재스퍼 모리슨 스튜디오

제게 그 와인랙과 의자가 파격으로 다가온 건 당시의 디자인 트렌드 때문입니다. 1990년대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였어요. 화려한 색과 패턴, 유머러스하고 과장된 형태가 인기를 끌었죠. 프랑스 디자이너 필립 스탁, 멤피스 그룹의 에토레 소트사스가 본 적 없는 형태의 가구와 소품을 내놓고 있었어요. 디자이너의 개성이 가득 밴 물건이 쏟아졌던 거예요.

모리슨은 완전히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주 평범해서, 언뜻 눈에 띄지 않는 제품들을 만들었죠. 그가 왜 이런 디자인을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했습니다. 롱블랙 인터뷰에서 그 뿌리를 짐작하게 됐어요.

“저는 주변 환경에 대한 감수성을 갖고 태어난 것 같습니다.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기분이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했죠. 부모님이 형제들과 저를 데리고 유럽의 고딕 성당들을 보러 다니셨는데, 저는 밖에 있게 해달라고 조르곤 했어요. 그 분위기atmosphere가 싫었고, 안에 있으면 너무 슬퍼졌거든요. 이 감수성이 자라서 ‘무엇이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가’에 대한 이해로 발전했고, 저를 디자인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분위기atmosphere. 롱블랙과의 인터뷰에서 모리슨은 열두 번이나 이 단어를 언급합니다. 그만큼 그는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디자인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의 물건을 디자인하면서도 전체의 그림을 보는 거죠.

그럼 그에게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물건이란 어떤 걸까요?

재스퍼 모리슨에게 좋은 디자인이란, 눈에 띄는 물건이 아니라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물건이다. 사진은 재스퍼 모리슨과 비트라 APC 의자. ©Thomas Martin

Chapter 2.
지극히 평범해서 예사롭지 않은 것

이쯤에서 모리슨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긴 「슈퍼 노멀Super Normal」 전시를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재스퍼 모리슨과 후카사와 나오토*가 함께 2006년 도쿄·런던·밀라노에서 연 전시회입니다.
*일본의 산업 디자이너. 무지MUJI의 디자인 고문을 지냈으며, 현재 일본민예관 관장이다. 

전시장에 놓인 건 작품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늘 마주치는 물건이었습니다. 투명한 몸통에 빨간 주둥이가 달린 간장병, 완만한 육각형 몸통의 볼펜, 잘록한 손잡이의 유리 정종잔, 대나무 체를 흉내낸 플라스틱 체… 

200여 개의 물건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본질적 기능에 완벽하게 충실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그래서 널리 쓰인다. 자연히 아주 평범해 보인다.

‘슈퍼 노멀’이라는 개념이 나온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후카사와 나오토는 2005년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Salone Internazionale del Mobile에 마지스Magis사와 함께 알루미늄 스툴을 출품했습니다. 둥근 좌판에 곧게 뻗은 네 개의 다리. 알루미늄 소재란 걸 제외하면 우리가 늘상 보는 평범한 스툴 그대로였죠.

문제는 전시장 한편에 놓인 이 스툴을 관람객들이 작품으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넓은 박람회장을 다니다 다리가 아프니 덥석덥석 앉곤 했대요. 후카사와는 모리슨에게 전화로 하소연합니다. “전시된 내 의자에 사람들이 앉는다”고요. 모리슨은 소리쳤대요. “그게 바로 슈퍼 노멀이야!” 하고요.

“그 박람회에서 저는 무지의 직원인 오쿠타니 다카시 씨를 만나 대화를 나눴어요. 저는 제가 디자인에 대해 갖게 된 새로운 이해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이름 없는 디자이너가 만든 사물들이 작가가 드러나는 사물들보다 훨씬 더 훌륭한 성능을 발휘한다는 것을요.”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그때 오쿠타니가 제시한 단어가 ‘슈퍼 노멀’입니다. 특별한 평범함. 재스퍼 모리슨과 후카사와 나오토는 이 개념에 마음을 사로잡혔어요. 마침 전화 통화를 한 후카사와에게 그 개념을 전한 겁니다. 이듬해 둘은 ‘특별한 평범함’을 지닌 물건들을 모아 전시를 엽니다.

“일반적으로 특별한 것은 평범한 것보다 덜 실용적이고, 길게 보면 유익하지도 않다. 특별한 것들은 그릇된 이유에서 시선을 끈다. 어쩌면 그런 특별한 것들이 어정쩡하게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좋았을 수도 있을 분위기를 흩뜨리고 만다.”
_재스퍼 모리슨,  『슈퍼노멀』 중에서

‘슈퍼 노멀’ 개념을 사람에 빗대자면, ‘눈에 띄지 않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동료’ 같은 느낌일까요? 

이렇게 조용히 존재하는 물건이 공간의 분위기를 살려준다는 것이 그의 오랜 믿음이었습니다. 그럼 디자이너는 어떻게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을까요.

재스퍼 모리슨이 후카사와 나오토와 함께 2006년 도쿄 엑시스 갤러리에서 연  「슈퍼 노멀」 전시. 두 사람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물건’을 소개하며 ‘슈퍼 노멀’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재스퍼 모리슨 스튜디오

Chapter 3.
에고를 지운 물건은 늙지 않는다 

조용히 존재하는 물건. 관심을 요구하지 않는 물건. 그래서 오래 써도 질리지 않는 물건. 모리슨이 생각하는 ‘슈퍼 노멀’의 특징입니다. 실제로 모리슨의 대표작들도 그래요. 20년,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산되고, 팔리고, 쓰입니다.

롱블랙은 물었습니다. “모든 게 빠르게 소비되고 버려지는 시대에 슈퍼 노멀의 가치가 살아남겠느냐”고요. 모리슨은 이렇게 답했어요.

“그게 바로 슈퍼 노멀한 물건의 비밀이에요.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사랑받게 된다는 것이요.”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그건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우선 이 제품들은 디자인이 ‘본질적 기능’에 아주 충실합니다.

“형태가 본질로 축약되면 나이가 들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형태에 적절한 기능과 분위기를 만드는 힘이 더해지면, 그 물건은 계속 사랑받습니다.”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재스퍼 모리슨이 롱블랙 인터뷰에서 꼽은 자신의 대표작을 살펴볼까요. 

알레시Alessi의 와인잔(2007년). 저도 매우 애지중지하는 잔입니다. 와인잔 특유의 우아하고 잘록한 다리 대신 뭉뚱하고 투박한 다리가 달려있죠.

FSB 도어 핸들 1144(1991년). 이 제품을 구하려고 이탈리아의 철물점을 뒤지던 기억이 납니다. 굉장히 고전적인 감성의 문손잡이인데, 선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로젠탈Rosenthal의 티 머그(1997년). 모리슨은 오래된 머그에서 영감을 받아 이 티 머그를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완벽한 머그의 형태를 유지하고 손잡이만 바꿨다는 거죠.

이 제품들의 공통점이 느껴지시나요. 과장되지 않은 단정한 형태. 하지만 더 독특한 것은 이들 제품에 원형原型이라고 부를만한 모델이 있다는 겁니다. 

모리슨은 실제로 자신의 알레시 와인잔이 “모든 프랑스 카페에서 사용하던 전형적인 발롱ballon 와인잔*과 비슷하다”고 말했어요. 로젠탈 티머그 역시 이미 존재하던 오래된 머그에서 형태를 따왔고요.
*프랑스 카페에서 하우스 와인을 담아주곤 하는 몸통이 둥글고 다리가 짧고 뭉툭한 와인잔.


2007년에 출시된 알레시의 와인잔 사진을 보여주는 김성곤 교수. ©롱블랙

저는 이것이 디자이너로서 가장 어려운 경지라고 믿습니다. 남다른 감각을 품은 이가, 평범하게 주변에 널린 물건을 본떠 제품을 디자인하는 일 말입니다. 내 개성을 물건에 새기겠다는 마음, 즉 창의적 자아Creative Ego를 내려놓는 거죠.

“좋은 사물을 디자인하려면 자신의 창의적 자아Creative Ego를 억제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물이 자신의 자아를 드러내는 수단이 아닌, 그저 사물 그 자체가 되도록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모리슨은 일본 민예民藝의 아버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100년 전 남긴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저도 자주 들춰보는 『공예문화』에서 야나기 무네요시는 “가장 싼 물건이 가장 아름다운 물건이 될 수도 있다”며 이렇게 썼습니다.

“그런즉 보통이라고 해서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건에 뜻밖에도 어떤 참다운 가치가 깃들어있다. (…) ‘보통성’이야말로 우리를 온갖 꾸밈이나 의식의 초과에서 보호해 주는 원만한 성질이다. 작자의 이름을 새겨 넣을 만한 물건이 못 된다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을 자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또한 그것을 보는 우리도 자유로움을 느낀다. 보통 물건인 때문에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_야나기 무네요시, 『공예문화』에서

그럼 디자이너가 자아를 버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FSB 도어 핸들 1144과 설계도. 재스퍼 모리슨은 ‘보통 물건에도 참다운 가치가 깃들어있다’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철학을 강조했다. ©Timm Rauter

Chapter 4.
자아를 버린 자리에, 관찰이 들어선다 

자아를 버린 디자인.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냥 최대한 덜어내면 되는 것 아니냐고요. 제 학생들도 자주 묻습니다. “이런 단순한 디자인은 저도 하겠는데요?”

단언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게 내공이거든요. 롱블랙도 모리슨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더군요. “당신의 작업은 ‘무엇을 더할까’가 아니라 ‘무엇을 뺄까’에서 시작한다고 들었다”고요. 모리슨은 부드럽게 바로잡았습니다.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닙니다. 출발점이 있어야 해요. 이 사물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느낌이나 개념이요. 그다음 그것이 어떻게 사물이 될 수 있을지 풀어나가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디테일을 걷어내며, 사물의 본질을 찾아가는 거죠.”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즉 “이 물건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그 답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모리슨의 제품을 통해 보건대, 그 답은 ‘관찰’입니다. 

제가 아끼는 알레시의 접시, 플레이트 볼 컵Plate Ball Cup 시리즈를 볼까요. 겉보기엔 정말 평범한 흰색 도자기 접시입니다. 그런데 접시 가장자리가 유난히 도톰해요. 보통의 접시는 끝이 갈수록 얇게 마무리되는데 말이죠.

레스토랑에서 기름 묻은 손으로 서빙하는 사람을 생각해 볼까요. 손이 미끄러워 접시를 놓치기 쉽겠죠. 그런데 테두리에 턱이 있으면 쉽게 접시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제 애장품인 무지의 벽시계도 그래요. 전 이 시계가 모리슨의 디자인인 줄도 모르고 샀습니다. 왜 이렇게 낯익고 편안한 느낌이 드는지 살펴봤더니, 시계판의 디테일을 쇠자에서 따왔더군요. 12 대신 0으로 시작하는 숫자, 폰트와 눈금의 배열, 모서리의 둥글기가 모두 쇠자를 닮은 거예요.

쇠자가 뭡니까. 정밀함의 도구잖아요. 시계도 정밀함의 도구죠. 두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포개집니다.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데, 몸이 먼저 알아봐요. 일상에 이미 존재하는 조형 언어를 찾아내는 눈. 그게 이 디자이너의 능력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자아를 지워도 개성은 남는다는 겁니다. 후카사와 나오토는 제품 모서리에 2.5R*을 즐겨쓰는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리슨은 모서리를 좀 더 둥근, 5.5R로 다듬는 경우가 많고요. 후카사와의 모서리는 조금 더 날렵하고, 모리슨의 모서리는 조금 더 완만한 거예요. 그 3밀리미터 차이가 개성이 됩니다. 작가의 글에 문체가 있듯, 디자이너에겐 조형의 문체가 있는 겁니다. 이름을 안 봐도 ‘아, 모리슨인가’ 하고 알아보는 거죠.
*디자이너들이 흔히 ‘R값’이라고 부르는 모서리의 둥글기. 2.5R은 반지름 2.5㎜의 곡률을 뜻한다.

그러니 자아를 버린다는 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게 아닙니다. 개성을 소리치는 대신, 오래 봐야 알아보게 남기는 거예요. 그 미묘한 감도는 관찰에서 나오는 거고요.

“좋은 디자이너는 사물과 분위기, 그리고 사물이 쓰이는 상황을 예민하게 지켜보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접시를 나르는 손을 보고, 쇠자의 눈금을 보고, 모서리의 5.5밀리미터를 다듬는 것. 저는 이걸 감도感度라고 부릅니다. 물건을 오래, 집중해서 보다 보면 물건에 대한 감도가 높아져요. 남들이 그냥 지나치는 게 보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김성곤 교수가 보여준,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무인양품의 벽시계.익숙한 쇠자의 조형 언어를 시계에 담았다. ©롱블랙

Chapter 5.
소리치는 물건들의 시대 

여기서 조심할 게 하나 있습니다. 심플이 유행이 되는 순간, 가짜가 태어난다는 거예요. 

요즘 미니멀리즘 디자인이 넘칩니다. 버튼 하나 없는 흰색 가전 제품, 화이트 일색의 인테리어처럼요. 모리슨은 그런 유행과 자신의 작업을 구분했습니다. 

“세상엔 가짜 단순화fake simplification가 많습니다. 그것들은 복잡함만큼이나 나쁩니다. 좋은 사물이 이루는 전체 그림을 무시하니까요. 분위기를 개선하고, 사용의 즐거움을 끌어내는 그 전체를요.”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그냥 미니멀하게 만드는 건 ‘스타일’입니다. 자아를 뺀 것처럼 시늉했지만, 사실은 ‘미니멀한 것을 만들겠다’는 자아가 가득 들어간 거죠. “다 덜어내겠다”고 마음먹은 자아는 “가득 채우겠다”고 마음먹은 자아와 다를 바가 없는 셈입니다. 둘 다 ‘어떻게 보여야 하지’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으니까요.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시금석은 시간입니다. 근사한 물건은 많아요. 하지만 모리슨은 그런 물건을 경계하라고 말했습니다. 

“첫눈에 띄는 물건은 길게 보면 실망을 줄 수도 있습니다. 조용한 물건과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슈퍼 노멀한 사물은 단기적인 ‘눈요기Eye Candy’를 넘어 오래 곁에 남을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주목받을 기회를 얻겠죠.”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하지만 우리는 이미지의 시대에 살고 있잖아요. 인스타그램에는 시선을 사로잡는 물건이 넘쳐나고 있어요. 우리 마음은 쉽사리 심플해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두 빅테크 알고리즘의 피해자입니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스스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을 극단으로 우리를 밀어붙여요. 중독적이고, 분열적이고, 파괴적이죠. 스스로 생각할 자유를 되찾으려면, 그 소음에서 벗어날 평화로운 환경이 필요합니다.”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심플한 삶이 더 중요해진 이유입니다. 재스퍼 모리슨은 독자들에게 당부했어요. 

“분위기에 집중하세요. 조용히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물건을 고르세요. 살아있다는 게 기분 좋게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요. 시선을 끌려고 소리치는 물건들의 소음은 무시하세요.”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로젠탈의 ‘더 문 시리즈 (1997년)’. 모리슨은 오래된 머그에서 영감을 받아불필요한 요소를 모두 없앤 티 머그를 디자인했다. ©로젠탈

Chapter 6.
AI는 와인잔을 디자인할 수 없다

「슈퍼 노멀」 전시로부터 20년. 마지막으로 롱블랙은 시대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AI에게 슈퍼 노멀의 가치를 가르치면, AI도 그런 물건을 만들 수 있을까요.” 

모리슨의 답은 인터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단호했습니다.

“AI는 슈퍼 노멀한 디자인을 흉내 내는 것 이상은 못 할 겁니다. 슈퍼 노멀은 사물과 함께 살아본 개인의 경험에서 나오거든요. 어떤 잔을 쓸 때의 즐거움 같은 것이요. AI는 잔을 쓰는 인간의 현실과 그때의 감정을 경험할 수 없어요. AI가 친구들과 테이블에 둘러앉아 와인을 마실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흥미로운 와인잔을 디자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기술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는 “AI가 재료의 경제성, 공학적 성능은 더 잘 계산할 거”라 인정했어요. 이를테면 “자동차 같은 복잡한 시스템을 설계하는 데는 훨씬 유용할 것”이라고도 말했죠. 다만 와인잔과 의자처럼, 손과 입술과 몸이 매일 만나는 물건은 다르다는 겁니다.

디자이너로서 저는 이 답에 절반쯤 동의합니다. 요즘 세대에게 AI는 마치 컴퓨터처럼 자연스러운 협업 도구예요. 젊은 디자이너들은 모리슨의 말을 다 이해하진 못할 겁니다. 하지만 핵심은 남습니다. 어떤 잔이 좋은 잔인지는 데이터가 아니라, 그 잔으로 마셔본 사람만 안다는 것.

모리슨은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 그리고 일상의 심플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호기심을 가지세요. 과거를 공부하세요. 책을 읽고 들여다보세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있으니까요.”
_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인터뷰에서

Hay에서 제작한 팩 체어(2026)를 조립하는 재스퍼 모리슨의 모습. 그는 “좋은 물건은 일상을 살아본 감각에서 태어난다”고 말했다. ©재스퍼 모리슨


롱블랙 프렌즈 B

대화를 마치고, 김성곤 교수는 테이블에 펼쳐놓았던 물건을 가방에 도로 담았습니다. 무지의 시계를 종이로 감싸고, 대여섯 권의 책들을 포개 런던에서 직접 사 온 모리슨 샵 에코백에 넣었죠. 그 손길이 오래된 친구를 대하는 듯했습니다.

집에 돌아와 글 첫머리의 카페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이제야 그 공간의 비밀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카페가 심플했던 건 물건이 적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소리치는 물건이 없어서였어요. 원목 창틀과 흰 테이블, 선반 위의 접시와 컵들. 저마다 조용히 제 몫을 하며 좋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던 겁니다.

롱블랙 피플, 당신 곁에 조용히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물건이 있나요. 김성곤 교수처럼, 평생 곁에 둘 물건을 지금부터 천천히 찾아보면 어떨까요.

심플의 발견 4화에선 심플하게 공간을 유지하는 비결을 더 깊이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기대해주세요.

1982년 가을, 재스퍼 모리슨은 영국 왕립예술학교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사진은 1983년 그가 자신이 디자인한 ‘슬래티드 스툴’을 들고 서 있는 모습. 최소한의 재료로 가벼움을 살린 스툴이다. ©재스퍼 모리슨 스튜디오
플라이우드 체어의 설계도. 앞다리는 곧게, 뒷다리는 완만한 곡선으로 설계했다. ©재스퍼 모리슨 스튜디오
재스퍼 모리슨과 후카사와 나오토는 도쿄에서  「슈퍼 노멀」 전시를 연 뒤, 그 이듬해인 2007년에 책 『슈퍼 노멀』을 펴냈다. 재스퍼 모리슨은 슈퍼 노멀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 쓰고 싶은 물건”이라고 설명했다. ©재스퍼 모리슨 스튜디오/라르스 뮐러 출판사
1991년에 출시된 FSB 도어 핸들 1144. 재스퍼 모리슨은 도어 핸들을 디자인하면서 “디자이너의 역할은 형태를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타당한 이유로 형태를 적용하는 것임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Hans Hansen
1988년 베를린 문화도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DAAD 갤러리에서 한 설치 작업. 플라이우드 체어가 놓여있다. ©재스퍼 모리슨 스튜디오
『슈퍼 노멀』에 수록된 사진. 후카사와 나오토(왼쪽), 재스퍼 모리슨(오른쪽)이 야나기 소리(가운데)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야나기 소리는 일본 민예 운동의 창시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아들이다. ©롱블랙
재스퍼 모리슨이 디자인한 알레시의 접시. 지극히 평범한 디자인처럼 보이지만, 접시 가장자리가 도톰해 서빙하는 사람이 접시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Santi Caleca
재스퍼 모리슨의 작품을 소개하는 김성곤 교수. ©롱블랙
김성곤 교수가 소장한 재스퍼 모리슨의 저서와 관련 서적들. ©롱블랙
김성곤 교수는 인터뷰가 끝난 뒤 가져온 책과 물품을 모두 에코백에 넣었다. 에코백은 재스퍼 모리슨 샵에서 그가 직접 구매한 것이다. ©롱블랙
평범한 것의 특별함을 파고들어 ‘심플함’의 의미를 전해온 디자이너, 재스퍼 모리슨. 그는 “좋은 디자인은 사물과 함께 살아본 경험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Elena Mahugo

1982년 가을, 재스퍼 모리슨은 영국 왕립예술학교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사진은 1983년 그가 자신이 디자인한 ‘슬래티드 스툴’을 들고 서 있는 모습. 최소한의 재료로 가벼움을 살린 스툴이다. ©재스퍼 모리슨 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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