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영 : 장 줄리앙부터 피치스까지, 협업으로 창의성을 끌어내다


롱블랙 프렌즈 K 

관객 22만 명을 동원하며 성황리에 끝난 <장 줄리앙 : 그러면, 거기> 전시부터, 자동차문화 브랜드 ‘피치스Peaches’, 패션 브랜드 ‘스테레오 바이널즈Stereo Vinyls’까지. 모두 한 사람이 디렉팅 했습니다. 허재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예요.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 공간 기획자, 전시 기획자, 작가 에이전트, 사업가, 디자이너… 이 모두가 허 디렉터 앞에 붙는 수식어죠. 어떻게 한 사람이 이토록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요?



허재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허재영 디렉터는 지금을 ‘협업이 중요한 시대’라고 정의해요. 이제는 어떤 분야든 전문가가 넘치잖아요. 전문가들을 어떤 주제로, 어떻게 조합할지 조율하는 기획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가 말하는 기획자의 경쟁력이 의아해요. ‘멋진 친구와 일하기Working with friends’. 학교 동창부터 지인 결혼식에서 만난 인연까지, 허 디렉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협업 파트너를 만듭니다. 그게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비결이라면서요. 이야길 더 들어봐야겠어요.


Chapter 1.
힙합 패션을 좋아한 소년, 그래픽 티셔츠에 눈뜨다

어린 허재영은 말수가 없었어요. 천주교 신자였던 부모님은, 그를 14살일 때부터 예비 신학교에 보냈죠. 허 디렉터는 크면 당연히 신부가 될 줄 알았대요.

신학교 선생님의 한마디가 허 디렉터의 길을 바꿨어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먼저 하고 와라, 그런 뒤에 신부가 되도 늦지 않아.” 이때 허 디렉터는 숨겨왔던 ‘패션’에 대한 열망을 떠올립니다.

“그 시절 저는 옷이나 그림으로 제 개성을 표현하곤 했어요. 학교가 끝나면 마을버스를 타고 문정동 옷 상설매장에 갔다가, 저녁엔 지하철 타고 이대 편집샵에 갔다가, 새벽엔 동대문 도매시장을 찍고 집에 오는 식이었어요. 이글거리는 불꽃 문양이 박힌 티셔츠를 입을 때마다 강해지는 기분이었죠. 에어조던 로고를 신발에 따라 그리기도 했어요.”

신부가 되기 전, 허 디렉터는 마지막으로 ‘취미의 정점’을 찍어보기로 했어요. 힙합 패션에 들어갈 그래픽을 그리고 싶어, 미대 입시에 도전했죠. 스무 살엔 경원대학교에서 순수미술을 배웠고, 일년 뒤엔 삼성디자인교육원(SADI)에 들어가 패션 디자인을 배웠어요. 

수업은 혹독했어요. 3년간 색채와 명암, 원근법, 타이포그래피까지 압축적으로 배워나갔죠. 학기중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먹고 자야 했어요. 모두가 지쳤을 때, 허 디렉터는 문득 주변 친구들을 둘러봅니다.

“문득 ‘난 운이 좋은데?’란 생각이 들었어요. 당시 IMF 여파로 파슨스Parsons*에서 돌아온 유학파 친구들, 현업에서 돌아온 형, 누나들이 많았거든요. 이 친구들이 생각하는 방식, 태도, 전략을 24시간 달라붙어 배우는 것도 공부라고 생각했죠.”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사립 디자인 학교. 패션 분야에서 ‘최고 권위의 학교’로 평가받는다.

그곳에서 허 디렉터는 시야를 넓혔어요. 동기, 선배와 교류하며 그래픽 디자인, 웹 디자인과 개발에도 관심 가졌죠. 덕분에 그는 졸업 후 업계 최고라 평가받던 디지털 디자인 회사 ‘디스트릭트*’에 들어갑니다. 그곳에서 웹 디자인, 그래픽 디자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했어요.
*국내 1세대 웹 디자이너 故 최은석이 2004년 설립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삼성전자의 다수 웹사이트를, 2010년대 이후 대규모 미디어아트와 설치물을 제작하고 있다. 

롱블랙과 인터뷰하는 허재영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그는 신학교 진학 계획을 접고, 평소 열망했던 미술과 패션 디자인을 배우러 떠났다. ⓒ롱블랙

Chapter 2.
‘뭘 표현했는가’보다 ‘왜 표현했는가’가 중요하다

회사 생활 3년 차에 허재영 디렉터는 영국으로 떠납니다. 학교에서 배운 패션, 현업에서 배운 시각 디자인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었어요. 디자인 업계에서 ‘최고의 학교’로 쳐준다는 센트럴세인트마틴Central Saint Martin이 런던에 있단 말에, 곧바로 그래픽 디자인과에 지원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