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롱블랙 프렌즈 K
요즘 리셀가가 무려 335%까지 치솟은 경량 패딩이 있어요. 패션 브랜드 산산기어의 서픽스 푸퍼 재킷. 산산기어. 다소 낯선 이름인가요?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패션 브랜드예요. 글로벌 브랜드 푸마와 아식스부터 실리카겔과 바밍타이거 같은 인디 뮤지션이 손잡는 곳이죠.
2019년 런칭 이후 연평균 631% 성장했어요. 더 놀라운 건 자사몰 매출이 65%라는 점. 크림·무신사 같은 플랫폼 판매가 보편적인 요즘, 눈에 띄는 수치입니다. 2024년 3월에는 서울 서교동에 약 80평 규모의 플래그십 매장도 오픈했습니다.
한국뿐 아니에요. 해외 15개국 40여 개 편집숍에 입점해 있어요. 2024년 2월엔 도쿄 아오야마 한복판에서 팝업을 열었어요. 지난해 1월부터 파리패션위크에 꾸준히 쇼룸을 열고 있죠. 서교동 산산기어 매장에서는 한 중년의 일본인 관광객이 영상통화로 아들에게 묻더군요. “그래서 뭘 사가라고?”
산산기어의 무엇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끌어당기는 걸까요. 답을 듣기 위해 산산기어의 이상엽 디렉터를 만나봤습니다.

이상엽 산산기어 대표/디렉터
산산기어의 옷은 도시의 구조물을 닮았어요. 콘크리트 같은 그레이 톤, 철제 표면을 연상케 하는 메탈릭한 소재. 황폐한 미래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입을 법한 느낌이죠. 실제로 산산기어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어쩐지 이상엽 디렉터도 날카로운 사람이지 않을까 했어요. 트렌드의 결을 예민하게 베어내는, 차가운 사람일 거라고요.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는 따뜻한 오트밀 색 니트 상의에 차분한 흙빛이 감도는 바지를 입고 나타났어요. 말과 말 사이에는 충분한 여백을 두는 사람이었죠. 그에게 물었습니다. “빠르게 흐르는 트렌드를 어떻게 읽어내냐”고. 이상엽 디렉터가 한 박자 숨을 고르더니 답했어요.
“트렌드를 좇는다기보다는 그들과 호흡한다고 생각해요.”
Chapter 1.
패션은 나를 담는 그릇
이상엽 디렉터가 패션에 눈 뜬 건 고등학교 입학식 때였어요.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한 그에게 충격적인 장면이 펼쳐졌죠. 학생들이 모두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있던 거예요.
“충격이었어요. 당시 대구에서는 남학생들이 모두 통을 넓게 입거든요. 그게 멋의 기준이었어요. 그때 깨달았죠. 패션이란 단순히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환경과 문화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걸.”
이 디렉터는 멋진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기 시작합니다. 멋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공유하는 문화. 그 속에 있다 보면 자연스레 나도 멋있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죠. 스무 살이 되어 패션디자인학과에 진학했지만, 역시 학교 밖의 멋진 패션을 쫓아다니기 바빴어요.
그래픽 디자이너, 클럽 디제이, 패션 매거진 에디터들과 어울렸죠. 남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하는 태도가 몸에 밴 사람들이었어요. 대학생 이상엽은 한 번 더 깨닫습니다. 멋있는 패션은 메이커나 유행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고.
“저에게 패션 공부는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취향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내가 거쳐온 사람, 그들과 나눈 대화, 문화…. 이 모든 걸 관찰하면서 패션이 저에게 온 것 같아요. 옷을 만드는 건 그 연장선이었고요.”
물론 그 깨달음이 곧바로 산산기어로 발현되지는 못했어요. 두 번의 실패가 있었습니다. 2012~2015년 슈프림과 스투시 같은 스케이트 기반의 패션 브랜드가 인기를 끌었어요. 이상엽 디렉터도 스케이터와 손잡고 패션 브랜드 서울투케이, CRNY를 만들었지만, 모두 1년 만에 문을 닫았어요.
하지만 이른 실패는 자양분이 됐습니다. 문화를 온몸으로 살아내는 스케이터들과 브랜드를 만들었던 경험은 ‘나만의 브랜드’로 이어졌어요. 2019년 10월, 그는 세 번째 브랜드인 산산기어를 시작합니다.

Chapter 2.
산산기어 : 스트리트 패션에 실험성을 더하다
2019년 한국의 스트리트 패션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였어요. 슈프림, 스투시 같은 글로벌 브랜드와 이를 뒤따르는 국내 브랜드들이 자리를 굳히고 있었죠. 대부분 그래픽과 로고 중심의 디자인에 니트 방식*으로 짠 면 소재로 맨투맨·후드티를 만들었어요.
*면으로 만든 실을 고리(루프) 형태로 이어 짜는 방식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어요. 산산기어가 찾은 답은 ‘실험.’ 스트리트 패션에 디자이너 브랜드의 실험성을 더하기로 하죠. 소재부터 달리했어요. 폴리에스터·나일론·교직 원단을 택해 ‘절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어요. 옷 곳곳에 절개를 활용해 실루엣이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했죠.
“스트리트 브랜드는 편하고 캐주얼하지만 그만큼 디자인이 단순해요. 반면 실험적인 디자이너 브랜드는 다소 부담스럽죠. 그 중간 선택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산산기어’라는 이름에도 이같은 브랜드의 지향점이 담겼습니다. ‘상쾌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순간’을 뜻하는 순우리말 ‘산산하다’에, 스케이터 친구들이 보호장비와 옷을 일컬을 때 쓰던 ‘기어gear’를 붙였어요.
“동양적인 느낌을 넘어서 한국적인 이름을 짓고 싶었어요. 때마침 알게 된 ‘산산하다’는 우리말에 이끌렸어요. 제가 지향하는 새로운 스트리트 브랜드의 이미지와 잘 맞았거든요.”
브랜드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팬데믹이 닥쳤지만 오히려 기회가 됐습니다. 2020년 연매출이 전년 대비 1100% 상승해요.
“오프라인 매장들이 문 닫으면서 새로운 소비문화가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취향에 맞는 브랜드를 직접 디깅하기 시작했죠. 덕분에 산산기어 같은 새로운 라이징 브랜드들이 주목받았어요. 격변기가 가져다준 기회였죠.”

Chapter 3.
기획 : 옷에도 꼭지가 있어야 한다
산산기어가 초기부터 지켜온 원칙이 있습니다. 명분이 분명한 옷만 만들어요. 아무리 디자인이 멋져도 이유가 없으면 만들지 않습니다.
“멋진 것과 멋진 것이 합쳐지면 더 멋져질 것 같지만, 유치해져요. 중요한 건 이유죠. ‘왜 이 옷이 세상에 나와야 하는가.’ 이유가 명확한 옷이 멋있는 옷이에요.”
그는 특히 이십 대에 주목했어요.
“요즘 이십 대는 굉장히 섬세해요. 작은 디테일에서도 브랜드의 정체성과 진정성을 읽어내고, 자신이 속한 문화와 맞닿아 있는지 아닌지를 명확하게 구분하죠.”
이러한 태도는 산산기어가 시즌*을 기획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기획 단계부터 던지는 질문이 있어요.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문학작품이나 언론 기사처럼 전하려는 꼭지, 즉 메시지를 분명히 하는 겁니다.
*브랜드가 1년에 2번~4번에 걸쳐 나눠서 내놓는 신제품. 봄과 여름을 뜻하는 SS, 가을과 겨울을 뜻하는 FW로 나뉜다.
이 질문에 답하며, 어떠한 상황에 놓인 인물을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지 정해나갑니다. 예를 들어 2023년 SS의 테마는 ‘젊음youth’이었어요. 시즌 기획 단계부터 인디 록밴드 실리카겔과 협업해 뽑은 키워드죠.
산산기어가 바라본 청춘은 마냥 아름답지 않아요. 불안정하고 흔들립니다. 산산기어는 젊음의 이 양면성을 수은에 빗댔어요. 독성을 머금고 반짝이는 수은은 불안하지만 빛나는 청춘을 닮았죠. 시즌의 타이틀도 ‘MERCURIAL(수은)’이라 지었어요.
이 꼭지는 디자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스산한 장마철의 서울. 회색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두 청년이 있어요. 실버와 그레이톤의 바람막이·팬츠·재킷 모두, 수은처럼 흐르는 듯한 실루엣을 하고 있습니다. 나일론 소재는 빛을 받으면 약간의 광택이 비치죠.
이 수은 세계관은 음악으로도 확장됐어요. 실리카겔과 협업해 동명의 노래도 나왔습니다. “나보다 못난 건 없어.” 곡은 첫 소절부터 자기 비하와 긍정 사이를 오가는 이십 대들의 양가적인 마음을 노래해요.
“산산기어가 이십 대에게 인기 있는 건, 꾸준히 이해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의 뒤를 쫓기보다, 그 세대가 어떠한 감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 살피고자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들이 좋아하는 문화에 가닿더라고요. 실리카겔의 음악처럼.”

Chapter 4.
아이디어가 교차하는 순간, 컨셉이 탄생한다
트렌드를 주도하는 만큼 시류에 즉흥적으로 대응할 것 같지만 반대예요. 산산기어 팀은 생각보다 차근차근 움직입니다. 길게는 1년 반 전부터 다음 시즌의 구상을 시작해요.
그런데 초반 아이디에이션 방식이 조금 독특합니다.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티브팀에게는 디자인까지 고민하게 하고, 디자인팀에게는 컨셉 키워드도 도출하도록 해요.
“모두에게 이야기해요. ‘이런 컨셉이면 어떨까’하고 함께 떠올려달라고요. 크리에이티브팀이 디자인을, 디자인팀은 컨셉을 같이 떠올려달라고 하죠. 그럼 어느 순간 서로가 교차하는 지점이 생겨요. 그때 비로소 우리가 예상조차 못했던 결이 또렷하게 드러나요. 이렇게 모든 아이디어를 긁어모아야 생각지도 못한 차별성이 생기더라고요.”
예를 들어, 2025년 FW 시즌의 키워드 ‘WAYFINDER’의 초반 아이디에이션을 복기해 보죠. 디자인 팀에서는 나침반, 북극성, 내비게이터 같은 키워드를, 크레이에티브 팀에서는 옷을 겹쳐 입는 레이어드 스타일, 울 같은 부드러운 소재를 떠올렸어요. 절벽을 오르는 야생적인 산양의 이미지도 무드보드에 있었어요.
두 팀은 무드보드를 공유하며 컨셉을 추렸어요. 그렇게 ‘살아있는 존재는 저마다 각자의 길을 찾는다’는 한 줄 꼭지가 뽑혔어요. 이에 따라 ‘셰르파’라는 키워드가 나왔어요. 히말라야 등반객을 안내하는 셰르파는 홀로 무거운 짐을 지고 묵묵히 산을 올라요. 높은 산에서도 따뜻해야 하기에 여러 겹의 옷을 겹쳐입죠. 무릎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롱코트 형태에, 허리 부분을 끈으로 조이는 ‘추바Chuba’가 대표적이에요.
산산기어는 셰르파의 이미지를 도시 문명으로 데려와 봅니다. 도시에서 길을 찾는 방식은 다르죠. 산을 오르는 물리적인 등반 대신, 무수한 선택지 앞에서 다음 수를 읽어내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이상엽 디렉터는 ‘바둑’을 떠올렸어요.
셰르파 스타일의 롱 재킷은 허리에 조임끈을 달고, 여러 포켓을 배치해 기능성을 살렸습니다. 레이어드를 염두에 두고 품을 넉넉하게 잡았죠. 영화 「해피엔드」에서 방황하는 청춘을 연기한 배우, 쿠리하야 하야토가 바둑판을 들고 도시를 헤맵니다.
“시대와 세대의 정서를 브랜드의 언어로 재해석하려고 노력해요. ‘이런 것 같은데’ 하는 눈치로는 부족하고, 고객과 한 호흡으로 뱉고 내쉬어야 공명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Chapter 5.
제품 : 좋은 디자인은 기능에서 출발한다
디자인 철학에서도 멋만큼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이때 기능이란 일상 속의 편리함을 포괄해요.
“저에겐 너무 당연한 이야기예요. 제품은 소비자가 낸 금액에 맞는 가치를 줘야 합니다. 그러려면 일단 입었을 때 편해야 하죠. 옷이 입는 사람의 움직임과 상황에 그때그때 맞춰지는지를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어요. 기능과 패션이 함께 충족될 때 제품의 가치가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산산기어의 옷에 유독 절개가 많은 이유입니다. 원단을 잘라서 다른 원단 조각과 이어 붙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옷에 구부러지는 지점이 생겨 편하게 움직일 수 있어요. 디자인적으로도 옷이 어떤 형태로 보일지 정밀하게 설계할 수 있죠. 다만 공정이 복잡해 제작비가 올라가고 시간도 더 걸려요.
때로는 기능 그 자체가 독특한 디자인이 됩니다. 리셀가 335%를 기록한 ‘서피스 푸퍼 재킷’이 대표적이죠. 경량패딩을 산산기어식으로 재해석했어요.
“익숙한 것에서 특별함을, 특별한 것에서 자연스러움을 찾는 방식으로 디자인해요. 경량패딩 자체는 모두에게 익숙한 등산복이었어요. 패셔너블하게 입지 않는 카테고리였죠. ‘경량패딩을 산산기어 식으로 해석하면 뭐가 다를까?’ 고민했어요. 기능을 살리면서 아름다워 보일 수 있는 요소를 찾았습니다.”
쓰고 벗기 편하도록 모자에 스트링과 지퍼를 달았어요. 지퍼로 모자 입구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죠. 이때 지퍼를 내리면, 안쪽에 배치한 배색 원단이 드러나 은근한 색의 대비가 만들어집니다. 소맷단에는 핸드워머를 넣어 보온성을 높였어요.
또 패딩이 빛을 받으면 안쪽의 털이 은은하게 비치는 효과를 만들고 싶었어요. 겉감에 밝고 옅은 색을 썼고, 두께도 최대한 얇게 만들었죠.
2024년 SS와 FW에 출시한 ‘백팩 재킷’은 옷과 백팩을 하나로 합쳤습니다. 재킷 뒤판의 지퍼를 열어 소매와 모자를 넣으면, 그대로 백팩이 돼요. 2025년에 출시된 ‘리버시블 푸퍼 재킷’엔 소매 끝에 엄지장갑을 넣었어요.
“기능에서 답을 찾다 보면 오히려 과감한 디자인을 만들 수 있습니다. 대중적인 요소도 한 번씩 비틀면 아무도 안 해본 방식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지금의 대중은 실험을 원한다
산산기어는 패션 기업이지만, 실험 방식은 IT 스타트업과 비슷해요. 매 시즌마다 감도를 높인 독특한 디자인을 조금씩 선보여, 코어 팬들의 반응을 확인해요. 반응이 좋았던 요소는 다음 시즌의 제품 라인업에 적용하죠.
눈에 띄는 변화가 있어요. 코어 고객을 타겟했던 독특한 디자인에 대중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거예요. 이는 판매 수치로도 읽힙니다.
2021년에 출시된 웨이브 팬츠. 일반적인 바지는 양옆 봉제선이 직선이지만, 웨이브팬츠는 물결처럼 흐르는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허리에서 바지 밑단까지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죠. 처음 출시됐을 땐 ‘이게 팔릴까’ 의심이 들 정도로 생소한 스타일이었어요. 이제는 시즌마다 재출시할 정도로 인기예요.
올해 발매한 ‘어파인 커브 셋업’도 그렇습니다. 옷에 칼집을 낸 것처럼 재킷 소매부터 등판까지 지퍼가 그어져 있어요. 패션을 좋아하는 코어팬들을 위한 디자인이었는데, 출시한 날 준비한 물량이 완판됐어요. 리오더를 진행한 물량도 당일 품절됐습니다.
“대중들도 개인화되다 보니 실험적인 디자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분위기예요. 이 흐름이 ‘산산기어만의 방식’을 날카롭게 하는 건강한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Chapter 6.
대중과 코어팬 사이, 균형을 맞추는 법
궁금했어요. 실험적인 디자인과 대중성,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요. 이상엽 디렉터는 명확히 대답합니다. “타겟의 정체성을 흔들지 않는 것”
“저희는 타겟하는 사람에게만 멋있는 브랜드가 되고 싶어요. 산산기어의 타겟은 패션 자체가 라이프스타일인 사람들이에요. 산산기어가 특별한 날만 꺼내입는 ‘필살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옷장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죠.”
컬래버레이션을 할 때도 이 원칙 아래 움직여요. 협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푸마·아식스 같은 글로벌 패션 기업과의 협업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브랜드와 손잡으면, 산산기어를 처음 접하는 고객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요.
산산기어의 기획 방식이 여기에 적용됩니다. 브레인스토밍으로 독특한 키워드를 모아요. 푸마를 살펴볼까요. 푸마의 슬로건은 ‘forever fast’입니다. 산산기어는 이 문구에서 ‘배달’을 떠올렸어요.
캠페인 영상에선 배달 기사가 샛길을 누비며 ‘가장 빠른 길’을 찾는 모습을 표현했어요. 그 배달 기사는 푸마 신발을 신고 있죠. 무드를 살리려고 실제 배달 그릇을 포장하는 비닐 실링 기계를 사서 푸마 신발을 감싸기도 했어요.

두 번째는 컬처와의 협업입니다. 대중적 협업이 브랜드의 영역을 넓힌다면, 브랜드의 깊이는 여기서 나와요. 코어 타겟의 팬심을 자극하죠.
독일의 문화 웹매거진 ‘어드밴스드 리서치advanced research’와의 협업이 대표적이에요. 주제는 ‘분단’. 한국의 현재와 과거 독일의 역사적 경험을 만나는 지점을 시각화했어요.
전쟁 이후의 상처를 표현한 짙은 흑빛과, 동독 군대의 스트리히타른Strichtarn 패턴을 활용했어요. 비가 내리듯 흘러내리는 수직선이 특징입니다.
삼성 라이온즈와의 협업도 마찬가지예요. 보통 야구 구단의 콜라보는 선수를 모델로 기용하거나, 캐릭터 IP 가져오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요. 산산기어는 아버지와 아들로 이어지는, 야구장에 담긴 세대의 기억을 가져와 캠페인 영상으로 만들었어요.
“브랜드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게 중요해요. 산산기어만으로는 갇히는 경우가 많은데, 그 빈틈을 협업이 채워주죠.
단순히 브랜드 파워를 교환하는 방식은 지양해요. 로고만 얹어주고 끝나는 협업 말이죠. 산산기어 혼자서는 만들기 어려운 결과물을 협업으로 만들어 내는 게 핵심이에요.”
Chapter 7.
디스토피아엔 언제나 희망이 있다
트렌드는 우리의 의지 밖에 있어요. 통제도, 예측도 어렵죠. 지금은 트렌디해도, 내일 당장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산산기어의 미래를 묻는 질문에 이상엽 디렉터는 망설임 없이 답했어요. “끊임없이 변할 것”이라고.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브랜드는 한 사람이 만들고 끝이 아니라, 이를 소비하는 소비자와의 상호작용으로 계속해서 재탄생한다고 보거든요. 더는 재탄생하지 못할 때 수명을 다하는 거고요. 그러니 더 이상 저만의 것은 아닌 거죠.”
이어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어요.
“하지만 요즘엔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합니다.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결코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 명확해야 하지 않나.’”
그는 흔들리지 말아야 할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 명분 있는 디자인, 그리고 시대, 특히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는 노력.
이 기준은 산산기어가 오래전부터 구축해 온 디스토피아 세계관과도 닮아 있어요. 산산기어의 룩북을 보면 황폐한 도시 이미지가 등장해요. 차가운 콘크리트 구조물, 금속 질감. 산산기어는 그런 세상을 늘 상상해 왔어요. 예측 불가능하고, 언제든 질서가 뒤집힐 수 있는 세계를요.
하지만 산산기어의 세계관은 그저 파괴된 도시에서 끝나지 않아요. 불확실한 미래보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그들이 찾는 희망에 주목해요.
“청춘이라는 건 시대에 상관없이 늘 불안을 안고 사는 존재잖아요. 당사자들에게는 지금이 충분히 디스토피아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런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요. 위태로운 아름다움, 그 대비가 저희에겐 아름다워요. 거기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봐요. 산산기어의 세계관도 그런 희망을 찾아나가고 있고요. 이런 메시지 때문에 저희를 좋아해 주시는 거 아닐까요.”


롱블랙 프렌즈 K
인터뷰를 마치며 물었어요. 브랜드를 이끌며 가장 힘든 게 무엇인지. 그는 어쩌면 또 하나의 고객인 이십 대 팀원들과 호흡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했어요.
“솔직한 피드백을 주는 거요.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상대방이 상처받을까봐. 하지만 팀이 서로 믿고 일하려면, 정확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구조가 필수더라고요.
결론적으로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최선 같습니다. 서로의 가능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요. 내가 솔직하지 않았을 때 상대가 받는 피해가 더 크더라고요.”
롱블랙 피플, 오늘 여러분은 누구와 호흡하고 있나요? 떠오르는 친구에게 이 노트를 보내보는 건 어떨까요.

롱블랙 프렌즈 K
요즘 리셀가가 무려 335%까지 치솟은 경량 패딩이 있어요. 패션 브랜드 산산기어의 서픽스 푸퍼 재킷. 산산기어. 다소 낯선 이름인가요?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패션 브랜드예요. 글로벌 브랜드 푸마와 아식스부터 실리카겔과 바밍타이거 같은 인디 뮤지션이 손잡는 곳이죠.
2019년 런칭 이후 연평균 631% 성장했어요. 더 놀라운 건 자사몰 매출이 65%라는 점. 크림·무신사 같은 플랫폼 판매가 보편적인 요즘, 눈에 띄는 수치입니다. 2024년 3월에는 서울 서교동에 약 80평 규모의 플래그십 매장도 오픈했습니다.
한국뿐 아니에요. 해외 15개국 40여 개 편집숍에 입점해 있어요. 2024년 2월엔 도쿄 아오야마 한복판에서 팝업을 열었어요. 지난해 1월부터 파리패션위크에 꾸준히 쇼룸을 열고 있죠. 서교동 산산기어 매장에서는 한 중년의 일본인 관광객이 영상통화로 아들에게 묻더군요. “그래서 뭘 사가라고?”
산산기어의 무엇이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끌어당기는 걸까요. 답을 듣기 위해 산산기어의 이상엽 디렉터를 만나봤습니다.

이상엽 산산기어 대표/디렉터
산산기어의 옷은 도시의 구조물을 닮았어요. 콘크리트 같은 그레이 톤, 철제 표면을 연상케 하는 메탈릭한 소재. 황폐한 미래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입을 법한 느낌이죠. 실제로 산산기어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요.
어쩐지 이상엽 디렉터도 날카로운 사람이지 않을까 했어요. 트렌드의 결을 예민하게 베어내는, 차가운 사람일 거라고요.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는 따뜻한 오트밀 색 니트 상의에 차분한 흙빛이 감도는 바지를 입고 나타났어요. 말과 말 사이에는 충분한 여백을 두는 사람이었죠. 그에게 물었습니다. “빠르게 흐르는 트렌드를 어떻게 읽어내냐”고. 이상엽 디렉터가 한 박자 숨을 고르더니 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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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교동에 있는 산산기어 플래그십 스토어. 산산기어의 로고는 알파벳 S를 변형해 기하학적인 느낌을 표현했다. ⓒ산산기어
2023년 3월 시즌 ‘MERCURIAL’의 프리뷰를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산산기어는 매년 평균 631%씩 성장해왔다. ⓒ산산기어
초기에는 옷의 기능에 중심을 두던 산산기어의 에디토리얼 콘텐츠가, 최근에는 시즌 테마의 무드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사진은 2022년 SS ‘OOPart’s’ 에디토리얼 이미지. ⓒ산산기어
2021년에 출시된 산산기어의 웨이브 팬츠(왼쪽). 바지 옆면에 곡선 패널(오른쪽)을 겹쳐 넣은 구조로, 단추를 열면 활동성이 높아진다. ⓒ산산기어
24SS/FW에 출시된 백팩 자켓. 수납공간을 디자인으로 승화했다. 산을 오르다 더우면 자켓을 벗어 가방처럼 활용할 수 있다. ⓒ산산기어
소매를 엄지장갑으로 바꿀 수 있는 ‘리버시블 푸퍼 재킷’. 소매 끝단을 뒤집어 손 전체를 감싸는 구조이다. 기능을 살려 제품의 킥으로 살렸다. ⓒ롱블랙, 최근우
산산기어 서교동 매장 2층에 놓인 바둑판. 이상엽 디렉터는 매장이 산산기어의 컨셉을 보여주는 ‘전시장’ 같은 공간이라 말했다. ⓒ산산기어
올해 1월 파리에서 열린 산산기어 쇼룸에 놓인 산양 오브제. 산산기어팀은 제품 출시 1년 반 전부터 팀끼리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가장 적합한 컨셉을 찾아 나간다. ⓒ산산기어
서울 서교동 플래그십 스토어에 전시된 산산기어의 제품들. 금속 재질의 옷걸이에는 산산기어 로고가 새겨져 있다. 현재 산산기어는 서교동 매장 외에도 여의도 더현대 서울에 입점해 있다. ⓒ산산기어
매장을 둘러보는 이상엽 디렉터. 매장 곳곳에 걸린 산산기어 옷의 특징을 직접 설명했다. ⓒ산산기어
산산기어의 옷은 절개선이 돋보이는 특징이 있다. 절개가 많을수록 공정이 길어지고 제작 비용이 올라가지만, 착용자가 옷을 입었을 때 더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 ⓒ산산기어
지난 10월 오아시스와의 콜라보 ‘매니악스챔버’. 오아시스의 갤러거 형제가 즐겨 입던 실루엣을 기반으로 했다. 이어폰·헤드셋 줄을 통과시킬 수 있는 홀 디테일의 후드 집업 등을 출시했다. ⓒ산산기어
지난 9월 공개한 NCT 위시와의 콜라보 ‘WISH GEAR : HEART STRINGS’. 디스토피아 세계관 속 소년병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멤버 여섯 명이 각기 다른 활 오브제를 들고 있다. ⓒ산산기어
지난 7월 미국 브랜드 ‘b.Eautiful’과의 콜라보. 이전에는 디스토피아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냈다면, 최근엔 붕괴된 세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산산기어
산산기어 매장에 출근한 직원과 대화하는 이상엽 대표. 그는 “처음엔 직원들에게 솔직한 피드백을 주는 게 어려웠다”고 말했다. ⓒ롱블랙, 최근우
2019년부터 산산기어 이끌어온 이상엽 디렉터. 그는 “트렌드는 좇는 게 아니라 호흡하는 것”이라 말한다. ⓒ롱블랙, 최근우
2023년 SS ‘MERCURIAL’의 에디토리얼 이미지. 시즌 기획 단계부터 인디 록밴드 실리카겔과 협업해 동명의 노래가 나왔다. 사진은 에디토리얼에 담긴 실리카겔의 보컬 김한주. ⓒ산산기어
서교동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인터뷰하는 산산기어 이상엽 디렉터. 산산기어의 디스토피아 세계관은 불안한 시대에도 희망을 찾아 나가는 시선을 담고 있다. ⓒ롱블랙, 최근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