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룡 : 이타미 준으로 불린 건축가, 그가 남긴 ‘시간의 의미’


롱블랙 프렌즈 K 

포도호텔, 방주교회, 수풍석水風石 박물관. 제주의 대표 건축물이죠. 여러분은 이걸 설계하고 만든 사람이 모두 같다는 걸 아셨나요? 

(故) 유동룡. ‘이타미 준Itami Jun, 伊丹潤’으로 불린 건축가입니다. 재일교포이지만 귀화하지 않고 한국인으로 살았어요. 두 나라를 오가며 온양미술관(현 구정아트센터), 학고재 화랑(현 인사동 갤러리 이즈), 도쿄 M빌딩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2003년에는 아시아인 최초로 프랑스 국립 기메Guimet 박물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이듬해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Chevalier를 수상했어요. 2006년에는 ‘김수근 문화상’, 2010년에는 ‘무라노 도고상’을 받았죠. 

지난해 12월, 유동룡미술관(이타미 준 뮤지엄)이 제주에 세워졌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 만입니다. 이를 완성한 건 그의 첫째 딸, 유이화 ITM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입니다. 아버지를 기념하는 미술관을 유 대표는 왜 만들었을까요. 제주로 찾아가 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이화 ITM유이화건축사무소 대표 

유동룡미술관은 아버지의 유언에서 출발했어요. 돌아가시기 전 “내가 죽거든 책상 서랍을 열어보거라” 하셨거든요. 농담처럼 말씀해 긴가민가 했어요. 장례 후 유품을 정리해 보니, 정말 유언장이 나왔습니다. 내용은 이랬어요.

“내 이름을 딴 문화재단, 기념관, 건축상을 만들어라. 이 모든 책임은 내 딸 유이화에게 있다.” 

5초 정도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다 같이 웃었어요. 가족들은 “고생하라”며 어깨를 토닥여줬어요. 계좌나 땅이 아닌 책임을 남긴, 아버지다운 유언이었습니다.

Chapter 1.
시작 : 어머니의 집을 지어 데뷔한 건축가 

아버지가 제게 책임을 지운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통역사였거든요. 아버지는 한국어가 서툴렀어요. 일제강점기인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나 시미즈라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 자라셨어요. 보수적인 동네라 ‘조센징’이라고 놀림당하기 일쑤였어요. 그럴 때마다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달랬다고 해요. 

그래도 귀화는 생각도 하지 않으셨어요. 할머니의 영향이 컸습니다. 할머니는 “집에 불이 나면 족보는 꼭 챙기라”고 신신당부하던 분이셨어요. 건축가가 된 건 할아버지 때문입니다. “그림으로 먹고살기 힘들다”며 화가를 꿈꾸던 아버지를 염려하셨어요. 아버지가 미대 대신 건축학과에 진학한 이유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서른한 살 무렵, 이타미 준이란 예명을 쓰게 됐습니다. 건축사무소를 열려고 하니, 일본식 이름이 필요했어요. 그런데 무성 유씨에 붙은 한자가 일본에는 없는 한자였죠. 그러자 이름을 아예 새로 지었습니다. 가깝게 지낸 작곡가 길옥윤(요시야 준)의 이름 ‘준’과 일본 이타미 국제공항의 명칭을 합쳐 ‘이타미 준’이라 지었어요. 자유로운 세계적 건축가가 되자는 뜻을 담았습니다.

건축계 데뷔는 ‘어머니의 집’으로 했어요. 1971년에 만든 집입니다. 사무실을 내고 몇 년을 일없이 지냈거든요. 보다 못한 할머니가 “우리 집을 마음대로 지으라”고 제안했습니다. 아버지는 거주 공간을 가로로 길게 빼고, 그 가운데 원통형 창문 구조의 방을 냈어요. 할머니는 볕이 잘 드는 그 방에서 고사리를 말리셨죠. 당시 유명 사진작가였던 무라이 오사무村井修가 이 집을 촬영하면서, 비로소 아버지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1971년 유동룡 건축가의 데뷔작 ‘어머니의 집’. 햇볕이 들도록 만든 원통형 창문 구조의 방이 인상적이다. ⓒ무라이 오사무
 

Chapter 2.
온양미술관 : ‘모던’한 건물은 지역의 가치를 품는다 

아버지는 빛과 어둠을 작품에 담는 건축가였어요. 먹의 집(1975)이 대표적이에요. 내부는 벼루처럼 새까맣습니다. 가구나 집기에도 색이 없어요. 연필로 데생한 집을 그대로 세운 것 같았죠. 사람들은 일본에서 유행한 모노파*의 영향이라고들 했어요.
*나무·돌·점토·철판·종이 등 소재를 거의 손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직접 제시하는 화풍. 이우환 화백이 1970년대 일본에서 이 화풍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