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블랙 프렌즈 B
김난도 교수는 신형철 평론가의 평론을 읽으며 영감을 얻고는 한다고 말했습니다. 2005년 등단한 신 평론가는 특유의 “아름다운 문장과 정확한 비평”으로 유명하죠. 저는 그의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책머리에 쓰인 몇 문장을 오래오래 반복해서 읽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가 아내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쓴 글이에요.
앞으로 그와 나에게 오래 슬퍼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그곳에 우리가 꼭 함께 있었으면 한다. 그 일이 다른 한 사람을 피해 가는 행운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 같이 겪지 않은 일에 같은 슬픔을 느낄 수는 없기 때문이고, 서로의 슬픔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우리는 견딜 수 없을 것이므로.
‘이렇게 섬세한 문장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습니다. 마침 서점에서 신 평론가의 신간, 『인생의 역사』를 봤습니다. 만남을 청하기 좋은 구실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뻤어요. 오래전, 신 평론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는 정시우 작가와 함께 그를 만나고 왔습니다.
정시우 작가
수줍게 고백하자면,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제 인식은 신형철 문학평론가를 만난 2013년 8월 전후로 나뉩니다. 인터뷰로 마주한 그날 이후 ‘글을 대하는 자세’가 완전히 바뀌었고, ‘정확하게 칭찬’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과 자신의 ‘감수성을 포기해선 안 된다’는 것도 새겼죠. 너무 자주 실패해서 민망하긴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조금 덜 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0년. 광주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인터뷰하며 내내 생각했죠. 또 이렇게 10년을 달릴 동력을 얻는구나.
Chapter 1.
이론보다 경험, 겪는 만큼 쓸 수 있다
비평은 어렵고 딱딱하다는 편견이 있습니다. 문학 작품 없이 비평은 존재할 수 없다는 통념 또한 존재하죠. 비평이 지니고 있던 이러한 통념을 지우며 사랑받은 이가 신형철 평론가입니다. 2005년 등단 후, ‘비평이 애정과 감동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쉬지 않고 비평으로 증명해 왔죠.
문학에 대한 그의 글은 ‘작품이 건네는 영감을 껴안고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기에 단순한 해설이 아닌 또 하나의 문학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닳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손택수 시인의 시 세계를 풀어내며 쓴 이 문장은 문학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루시드폴의 노랫말은 시적이라기보다는 그냥 시다. 그의 서정성은 당대의 시인들과 경쟁한다”라는 신형철의 해설을 통해 어떤 노래는 새로운 감각을 부여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형철 평론가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아름답게 말해 온’ 사람입니다.
독자 대중이 그의 글에 몰려드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비평집 『몰락의 에티카』(2008),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2011), 영화 에세이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018)까지. 신형철 평론가의 책은 발간하는 것마다 베스트셀러였죠.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_『인생의 역사』 중에서
그가 4년 만에 내놓은 『인생의 역사』는 시화詩話집입니다. 스물다섯 편이 넘는 시가 인생과 다정하게 앉아 있죠. 시를 향한 신형철 평론가의 애정은 각별한 데가 있습니다. 문학을 공부하면서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최면 걸듯이 속으로 말해왔다고 해요. ‘시는 나를 사랑한다. 시가 나를 사랑한다.’
“기본적으로 시를 이야기할 때 가장 신납니다. 시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공부를 많이 한 분야라는 자신감이 있어서죠. 제가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이 가장 넓어서이기도 해요. 시는 함축적이기에 풀어 헤칠 여지가 커요. 그만큼 더 많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장르죠.”
신형철 평론가는 “시를 읽는 일에는 이론의 넓이보다 경험의 깊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겪음’으로써 더 깊게 ‘읽을’ 수 있다면, 제대로 읽음으로써 더 깊게 ‘쓸’ 수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결혼과 돌봄을 통과하며 생긴 삶의 변화가 글쓰기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느낀다고 합니다.
“특정 경험의 유무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는 일이 될 수 있기에 조심스러운데요. 어떤 특정한 경험을 하면 그 경험에 대해 몰랐던 때에 쓴 글하고 알고 난 후에 쓴 글만큼의 차이가 생겨요. 저는 이 차이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게 글을 더 좋게 만든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이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는 건 사실이에요. 최근에도 아내와 그런 얘길 했어요. ‘요즘 애들 관련 뉴스가 나오면 느낌이 다르지 않아?’라고 물으니, 다르대요. 이게 참 묘합니다. 애가 생기면 달라 보이리란 생각은 옛날에도 했는데, 그게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는 경험해 봐야 알아요.”
그렇다면 ‘모든 경험’이 글쓰기에 도움이 될까요. 겪지 않아도 되는 일도 세상엔 있지 않을까요.
“글을 쓰기 위해 모든 걸 다 겪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말려야죠. 그건 삶과 글이 역전돼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경험도 도움이 안 되는 건 없다’가 제 생각이에요. 얼마 전에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어디로 가서 무얼 바꾸고 싶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그런데 바꾸면 안 될 것 같더라고요.
과거로 돌아가서 저의 시행착오나 실수를 막는다? 그러면 그 일을 겪었기 때문에 얻은 지혜나 통찰도 없어질 테고, 그게 없어짐으로써 이후 생기지 않았을 일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웁니다. 과거의 상처가 지금 나의 좋은 부분을 하나라도 만든 게 있다면, 그걸 없애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Chapter 2.
문학 분석은 곧 인간에 대한 분석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꿈은 드라마 PD였습니다. 김종학 PD가 연출한 「여명의 눈동자」 같은 드라마들을 보면서, “PD가 돼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3 시절, 입시를 준비하며 흡수한 문학은 운명처럼 그를 들이받아 그의 인생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죠.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그는 다른 분야에 곁눈질하지 않고 대학원까지 10년을 달렸습니다.
“문학에 빠진 이유 자체가 평론이에요. 시나 소설보다 그 뒤에 실린 해석에 더 감동받곤 했어요. 기형도 시집에 실려 있는 김현* 선생님의 해설 같은 것들. 이 작품이 왜 좋고 이게 어떤 의미인지를 열정적으로 얘기하는데, 그게 더 멋있는 거예요. 정말 똑똑하고 섬세한 사람이구나, 감동받았죠.”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였다. 독자적인 문학 종류로서 비평의 틀을 다졌다는 평을 받는다. 1990년 작고했다.
섬세한 사람. 고故 김현을 향한 그의 감정은, 독자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과 동일합니다. 그는 성급한 이해로 작품을 판결하지 않고, 거친 언어로 단언하지 않습니다. 이병률 시인은 “신형철의 평론은 섬세하고 정밀해서 오히려 시를 더 시적이게 한다”고 했죠.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면모가 있기는 해요. 그런데 감성적인 것이 발달하면 무언갈 캐치하는 힘이 생기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죠. 저는 옛날부터 감성적이다 못해 감상적인 게 있었어요. 그것이 눈살 찌푸려지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절제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랬을 때, 논리의 세계로 갈 수 있게 해주는 ‘이론과 개념’들이 그 역할을 해 줬던 것 같아요. 이 두 가지가 제 안에 같이 있어서 감성적으로 와닿은 것들은 이론적으로 변환해 보고, 이론적으로는 알겠는데 확 와닿지 않을 때는 감정적인 것으로 변환해 보곤 했죠. 그게 잘 됐을 때, 감정을 건드리는데 개념은 갖춰진 균형 잡힌 글이 간혹 나왔고요.”
그의 글이 따뜻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대상을 향한 평론가의 분석이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온 분석과는 달라서일 겁니다.
“제가 하는 분석은 주로 ‘인간 감정과 경험에 대한’ 것이에요. 최승자 시인*을 예로 들어볼까요. 이 사람이 무엇을 실패했기 때문에, 뭘 간절히 찾아 헤맸고, 그게 왜 다시 절망을 안겼는가. 이걸 따라가는 게 최승자 시인을 이해하는 분석이지, 자주 쓰는 어휘가 어떻게 달라졌고 시의 형태는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저에게 매력이 없어요. 어쩌면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 저의 차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인간 내면’에 대한 관심 때문에 문학을 읽는 사람이고, 그것에서 뭔가를 배우려는 사람이거든요.”
*1979년 ‘이 시대의 사랑’으로 등단했다. 시집 『즐거운 일기』, 『기억의 집』 등을 냈으며 80년대가 배출한 스타 시인으로 꼽힌다.
Chapter 3.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글을 쓴다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사람으로서 신형철 평론가가 이토록 인간 내면을 탐구하는 이유는 확고합니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것이 왜 잘 안되는지 그는 자문자답하더니 “잘 몰라서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악의가 없었음에도 몰랐기에 폭력의 주체가 될 수 있으니 두려운 일이라고요.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고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순간 세상은 정글이 돼버릴 겁니다. 사회적 참사가 일어날 때 보면 알잖아요? 저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의식적으로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니까 튀어나오는 모진 말들.
이태원 참사를 두고도 ‘놀러 가서 죽은 건데’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사건이 왜 그렇게까지 됐는지 조금이라도 들여다보면 그런 말은 안 나오거든요. 공감 능력이라는 게 대단한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에요. 저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모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의 글에는 공감의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슬픔에 빠진 지난 10월, 그의 글이 사람들을 그토록 소환했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일본의 영화감독)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라고 한데 묶어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중략)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_『인생의 역사』 중에서
“『인생의 역사』가 출간되고 얼마 안 돼서 이태원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사실 이번 책의 내적 내러티브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얘기만 할 수 없게 돼버렸죠. ‘결국 또 슬픔과 애도 얘기를 하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건 한국 사회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책에 기대하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는 걸 알았죠. 비극에 대한 대처가 예술의 본질 같은 것일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학교가 ‘슬픔학’을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해 그는 아쉬워합니다.
“슬픔학이라는 게 슬픈 영화 틀어놓고 같이 울자, 이런 게 아닙니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슬픔이 있고, 비극 앞에서 사람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결핍은 사람을 어떻게 흔드는가. 이런 것들을 이해하면 판단할 때 영향을 미치지 않겠어요? 사회학과 심리학과 문학이 결합하면 충분히 교과서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왕따 문제도 많이 줄어들 거라 생각해요.”
Chapter 4.
성급히 판단하지 않아야만 볼 수 있는 게 있다
그러나 세상은 녹록지 않습니다. SNS에서 잘 팔리는 건 ‘진실’이 아니라 ‘감정’이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는 경향도 강한 시대입니다.
“이건 또 다른 뿌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외로움’의 문제 같아요. 한나 아렌트가 쓴 『전체주의의 기원』 끄트머리에 가면 뜻밖에도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체주의라는 거대한 집단 현상을 설명하면서, 사실은 다 외로워서 그런 거라고 하죠.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고 고립감에 빠진 사람들이 집단행동을 통해 소속감을 느끼고 존재의 이유를 찾는다고요. 처음엔 땡 한 충격을 받았는데,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외로운 이들에게 ‘진실이 무엇이냐’보다 중요한 건 ‘친구가 생기느냐 안 생기느냐’이기 때문에, 친구와 거짓을 믿으면서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진실을 말하면서 친구와 멀어지려는 경우는 거의 없겠죠. 유튜브 알고리즘에 갇혀서 집회에 나가는 건 무지한 분들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외로운 분들일 수 있는 거예요.”
『몰락의 에티카』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의 에티카(윤리)다”라고 썼습니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를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급한 판단들이 문학의 이러한 힘을 위협하고 있죠.
“요즘 문화 전반에서 도덕적인 것에 대한 기준이 뭐랄까... 협소해졌어요. 가령 불륜을 다루는 소설이나 영화를 예전에는 하나의 소재로 받아들였다면, 지금은 그 자체가 나쁘다며 걸러 버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알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내면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얻게 되는 진실이 있고, 그것을 돕는 게 문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부도덕한 소재의 작품이니까 안 읽을래’ 하는 건 인식에 대한 노력 자체를 포기하는 거죠.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 대해 ‘이건 불륜 소재라서 안 좋은 영화’라고 쓴 평이 화제가 되기도 했더군요.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 불륜 얘기에요. 『마담 보바리』도 불륜 얘기고요. 왜 이런 경향이 강해졌을까 생각해 보면, 타인의 실수를 통해 뭘 배우겠다는 여유가 없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그의 어떤 문장은 출구가 없어서 하루를, 한 달을, 흔들기도 합니다. 가령 “우리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다*”와 같은 문장.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인간을 돌아보게 만들죠. 스스로 면죄부를 주고 싶어 하는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란 생각도 들고요.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제가 이번 책 ‘인간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그런 표현을 썼죠. ‘5월 광주에서의 자신을 증언하는 분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누구라도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자신처럼 행동했을 것이라는 말.’ 그건 ‘자신들의 숭고함을 인간성 자체의 미덕’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에 반대되는 게 뭐냐면 ‘자기의 결함은 인간의 한계라고 이야기하는 방식’인 거죠. 그럼 딱 지금 말씀하신 면죄부가 생기는 거예요.
아까 언급한 한나 아렌트가 비슷한 얘길 한 적이 있어요. 2차 대전 후 독일에서 ‘독일 국민은 모두 반성해야 한다. 우리 중 누가 떳떳하냐’라는 분위기가 있었대요. 그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집단적 죄책감은 허구다. 그건 정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죠. 모두의 잘못이라고 얘기함으로써 아무의 잘못도 아닌 게 돼 버리는. 우린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늘 경계해야 합니다.”
Chapter 5.
마치며 : 글을 잘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신형철 평론가의 글 주제가 묵직하기만 한 건 아닙니다. 그의 ‘덕력力’을 확인할 수 있는 글이 『인생의 역사』 부록에 실려 있죠. ‘어느 윤상 덕후의 고백!’을 보시면 “덕질계의 초고수가 여기 있었구나” 싶어질 겁니다.
“윤상에 대해 쓰겠다는 건, 일생의 숙제 중 하나였는데 마침 ‘덕질’을 주제로 글 제안을 받아서 수락했죠. 그런데 제가 너무 흥분해서, 분량의 두 배를 써서 보냈지 뭐예요. 하는 수없이 원고를 수정했죠. 이게 참 웃긴 게, 이번 책 준비하면서 원본으로 실으려고 다시 봤는데… 고친 게 훨씬 나은 거예요. 더 못 줄일 글은 세상에 없고, 줄여서 나빠지는 글도 세상에 없다는 걸 다시금 실감했어요.”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8년을 가르친 그는 지난해 9월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비교문학전공)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있지만, 그가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 쓰는 건 배움입니다. 좋은 평론을 향한 그의 공부도 진행형이죠.
“제가 생각하는 좋은 평론은 정확하게 칭찬하는 거예요. 거짓말로 칭찬하는 것도 아니고 나 좋자고 하는 비판도 아닌, 칭찬할 만한 작품을 핵심을 건드리는 정확한 말로 좋다고 말해주는 글.”
신형철 평론가가 10년 전 한 말입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해요. 대신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정답을 가지고 ‘이건 몇 점’ 측정하는 평론이 많아요. 판관 역할을 하는. 비판적인 독해이고 필요한 작업이긴 하지만, 저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는 사람 같아요. 제가 원하는 건 ‘플러스’거든요. 시간을 투자해서 읽는 이것이 가치 있었으면 좋겠고, 그게 내 삶에 뭔가 플러스를 줬으면 좋겠는 거죠. 설사 어떤 부분에서 부족해도 배울 게 하나라도 있다면, 그걸 읽어내려고 하는 게 저는 좋은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작품이 나에게 주는 플러스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은가. 이걸 표현할 어휘가 빈곤해요. 비판을 위한 용어들은 섬세하게 개발돼 있는데, 이쪽은 너무 뭉뚱그려져 있어요. 그래서 흔히들 쓰는 말이 위로인데, 그 모든 게 위로일까. 조금 더 풍성한 말은 없을까. 그걸 찾아내는 게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비판적 에너지로 흠을 찾아내는 작업 말고, 그 반대편 용어들을 개발하자는 움직임이 해외에서도 있는 걸 보고, ‘내가 하고 싶었던 작업인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분야 이론서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이 작업이 조금 되면, 좋은 비평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또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독자들이 ‘글 쓰는 사람 신형철’에게서 읽어줬으면 하는 태도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가수 이소라 씨가 ‘뭘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노래 부르냐’라는 얘기에 이런 답을 한 적이 있어요. ‘나는 노래하는 사람이고 노래가 거의 전부인 사람인데, 노래마저 대충 하면 뭐가 되냐.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 너무 와닿는 말이었어요.
거기에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저 역시 글마저 대충 쓰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아요. 글 쓰는 것 외에는 세상에 별로 기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어서요. 그러니 저를 그렇게 읽어주시면 감사하죠. ‘글을 잘 쓰려고 정말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롱블랙 프렌즈 B
오래 제 마음을 흔들 문장을 많이 담아온 인터뷰였습니다. 저는 우선 정확한 말을 쓰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노트는 제가 좋아하는 신형철 평론가의 글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할수록 문학과 더 많이 싸우게 된다. 사랑으로 일어나는 싸움에서 늘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이는 잘못을 저지른 쪽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워한 쪽이다. 견디지 못하고 먼저 말하고 마는 것이다. 그래야 다시 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진다. 나는 계속 질 것이다.
_『느낌의 공동체』 중에서
롱블랙 피플, 오늘은 슬랙에서 각자 좋아하는 문장을 공유해 보면 어떨까요. 롱블랙 피플을 흔든 문장을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