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블랙 프렌즈 B
지인의 집에 초대받았습니다. 좋은 걸 맛 보이겠다며, 정갈하게 썰린 홍시 빛깔의 슬라이스를 내옵니다. 숭어알을 건조한 어란이라고 하더군요. 화이트 와인에 곁들이니 맛이 좋습니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치즈 맛이 나요.
이 어란, 대기업 회장들과 미쉐린 셰프들이 찾는다는군요. 만든 이를 궁금해했더니, 양재중 셰프라고 해요. 놀라운 건 그 역시 유명 일식당의 셰프였고, 지금은 지리산에 있다는 겁니다. 셰프는 왜 지리산에서 어란을 만들고 있을까요.
윤경혜 눈이부시게 대표
양재중 셰프의 어란은 저도 즐겨 먹어요. B가 지리산으로 양 셰프를 만나러 간다길래, 따라나섰습니다.
서울에서 남원까지 고속버스로 네 시간. 남원 터미널에서 다시 차로 20분간 굽이굽이 길을 올랐어요. 산내면 중기마을에 있는 바람골. 산바람이 한데 들이닥치는 이곳에, 양 셰프의 집이자 실험실이 있습니다. 겨우내 미처 다 녹지 못한 눈을 두른 지리산이, 코앞에 펼쳐져 장관입니다.
그의 집에 다다르면 서른 여개의 장독대가 가장 먼저 보입니다. 뚜껑을 여니 간장에 살얼음이 얼어 있어요. 겨울이라 비료를 품은 채 잠시 쉬고 있는 텃밭, 포클레인과 나무 널빤지가 널브러진 목공실, 감과 어란을 숙성시키는 서늘한 저장고까지. 한 시간 남짓 그의 터전을 구경하니, 배가 출출해졌어요.
마침 양 셰프가 어란과 와인을 꺼내옵니다. 그는 우리 두 사람을 반기면서도 아쉬워했어요. 봄이나 가을에 왔으면 어란을, 초겨울에 왔으면 감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며 말이죠. 붉게 수놓인 마당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그와 대화하며 사라졌어요. 강한 기운이 마당을 가득 채웠기 때문입니다. 어떤 환경에 놓여도 살 길을 찾아내고야 마는 양재중의 기운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