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블랙 프렌즈 B
지난 주말 충남 아산에 있는 온양민속박물관*을 다녀왔어요. 이곳에는 50미터 길이의 박물관 부속 건물이 있습니다. ‘일자집’이라 불리는 곳으로, 박물관의 허드레 공간으로 지어졌어요. 미색의 외관 벽과 연한 옥빛의 양철지붕. 40년간 그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해온 곳입니다.
*김석철 건축가가 온양민속박물관을 설계했다. 김 건축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중 한 명으로, 베니스 건축비엔날레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2022년 8월, 일자집은 카페로 새 단장했어요. 다각도의 테이블들이 시선을 끕니다. 그런데 유독 의자의 높이가 낮아요. 옆으로 긴 일자집 특성상, 의자에 앉았을 때의 시선을 해치지 않기 위한 배려예요. 통창 너머로 햇살 가득한 정원을 가만히 바라다보았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 참 좋다.’
카페 공간을 매만진 디자이너 임태희의 공간 철학이 묻어난 덕분일 겁니다. ‘담백하고, 검박하고, 너무 멋내지 않아 마음이 가는 공간.’ 그런 공간을 만들어내는 비결을 듣고자, 서울 양재천 숲이 내다보이는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로 향했습니다.
임태희 임태희 디자인 스튜디오 소장
오설록 제주 티뮤지엄, 패션 브랜드 르메르의 한남동 플래그십 스토어, 수제비누 브랜드 한아조의 북촌 쇼룸, 그리고 디저트숍 카라멜리에오까지. 임태희 소장의 전문 분야는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상업공간이에요. 하지만 그가 완성해낸 공간에는 오래도록 질리지 않는 힘이 있어요. ‘디자인 하지 않는 디자인’을 지향하기 때문입니다.
임태희 소장이 프로젝트를 마칠 때면, 친구들이 이렇게 말하곤 한대요. “끝난 게 맞느냐”고. 임 소장에겐 최고의 칭찬입니다. “너무 똑똑해 보이지 않는 걸 좋아한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묘함을 좋아한다”는 임 소장.
자신을 대변하는 키워드로 ‘멍청함’과 ‘미완’을 꼽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볼게요.
Chapter 1.
콤플렉스는 나의 힘
임태희 소장에겐 지금껏 선명한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있어요. 초등학교 미술 시간이었죠. 분수대 그림을 그렸는데, 사람 그림 위에다가 물을 덧칠했대요. 분수대 근처에서 노는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면, 물줄기가 마치 그 사람을 덮은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 모습을 표현한 거예요. 이를 본 선생님은 감탄했어요.
“그 그림으로 상까지 받았어요. 미술에 재미가 들렸죠. 세계어린이미술대회에 대표로도 뽑혔어요. 그러니 저는 제가 천재인 줄로만 알았던 거예요. 호기롭게 예중 입학 시험을 보러갔는데 바로 떨어졌어요. 입학 시험 과제가 데생이었는데, 저는 그려본 적이 없었거든요.”
미술 공부를 본격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 조금 늦은 감이 있었죠. 원하던 대학에는 낙방했어요. 재수를 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수차례의 좌절은 ‘내가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걸 되새겨주었어요.
그 시절의 아픔이 오래도록 콤플렉스로 남았어요. 일본 건축 유학에, 박사 학위까지 따게 했죠. 어쩌면 좋은 원동력이 되어준 것이 아닐까요.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세상은 공평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임 소장은 말해요.
“한번은 이토 도요* 선생님이 제게 그러셨어요. ‘콤플렉스야말로 가장 큰 에너지’라고. 그때만 해도 제가 ‘아니라고’, ‘아니라고’ 하면서 싸웠어요. (웃음) ‘선생님은 동경대 나와서 평생 승승장구해오지 않으셨나, 좌절해본 적이 없지 않으시냐’ 했죠. 이제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압니다. 좌절도 인생에 좋은 에너지가 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깨닫게 됐어요.”
*いとうとよお. 2013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의 건축가. 2004년에는 황금콤파스상을, 2006년에는 왕립영국건축가협회 금메달을 받았다.
빛을 디자인하는 잉고 마우러처럼
미술학도였던 그가 실내 디자인을 택한 건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미대 재학 시절 하루는 혼자서 남산에 있는 갤러리에 갔어요. 독일의 조명 디자이너 잉고 마우러Ingo Maurer*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죠. 텅 빈 갤러리에는 몇 점의 조명 기구만이 놓여 있었어요. 어쩐지 사무치게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분명 조명 전시인데, 빛을 전시하고 있는 것만 같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