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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 경험에 지적 탐구를 더할 때, 좋은 취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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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의 개척자. 김재원 아틀리에 에크리튜Atelier Écriture 대표에게 붙는 수식어입니다. 그는 2014년 성수동의 100평짜리 인쇄 공장을 개조해 자그마치Zagmachi라는 카페를 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성수동은 공장 지대였습니다. 자그마치가 생기면서 디자인 업계 사람들이 성수동을 드나들고, “성수동에 가면 재미있는 것이 있다”는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가정집 느낌의 카페 오르에르or.er.(2016), 소품샵 오르에르 아카이브or.er.archive(2018)와 어른을 위한 문구점 포인트오브뷰Point of View(2018), 구움과자 가게 오드 투 스윗ode to sweet(2020)까지. 성수에만 4개의 공간 브랜드를 운영 중입니다.

“김재원 대표가 새 공간을 열었다”는 건 그 시즌 성수동을 찾을 이유가 되곤 했습니다. 지난 12월에 런칭한 복합문화공간 LCDC에 한달 동안 3만명이 다녀간 것도, 이 공간을 그녀가 디렉팅했기 때문일 겁니다.

김 대표의 공간을 좋아하는 건,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감성이 묻어나기 때문입니다. 트렌드도 레퍼런스도 묻어나지 않는데, 굉장히 감각적입니다. 인터뷰를 해보니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롱블랙 인터뷰 위크 : 감각의 설계자들> 세번째 이야기입니다.


김재원 아틀리에 에크리튜 대표

제 직업이 뭐냐고 묻는 분들이 많아요. 저는 브랜드를 기획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제가 연 카페와 문구점, 그리고 디저트 가게는 모두 제 포트폴리오들입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무용無用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해요. 초등학생 시절, 예쁜 지우개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그 두근거림으로 평생 예쁜 물건들을 찾아다니고 모으고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연히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되고, 남들과 다른 제안을 하게 됐어요. 그러니 제게 “그 감각이 어디에서 나왔냐”고 묻는다면, 두근거림에서 시작됐다고 설명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Chapter 1.
수업료를 치러야 경험치가 쌓인다

지금도 처음 버거킹 매장에 갔던 꼬마 때의 충격이 생생합니다. 흑백의 체스 무늬 타일, 파란색과 빨간색의 네온사인. 특히 캐셔들이 쓰는 포스기에 사로잡혔죠. 키보드가 분홍색, 노란색, 파란색 색색깔인 거예요. 지금까지 내가 본 키보드는 회색이었는데! ‘크면 꼭 버거킹 캐셔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죠. 엄마는 늘 걱정하셨어요. “우리 딸은 커서 뭐가 되려고 저러는 걸까.”

실은 저의 넘버 원no.1 장래희망은 따로 있었어요. 바로 문방구 사장님! ‘포인트오브뷰’라는 문구점을 운영하고 있으니, 꿈을 이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전 용돈을 받으면 다 문방구에 탕진하던 어린이였어요. 유치원 시절 하루 용돈이 100원. 그걸 받으면 오빠랑 같이 문방구로 달려갔죠. 오빠는 항상 먹을 거부터 집었지만, 저는 아주 신중했답니다. ‘판박이 스티커는 한 장에 20원, 지우개가 100원, 떡 메모지가 100원.’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돌리는 거예요. ‘스티커 5장을 살 것이냐, 지우개 1개를 살 것이냐’ 희대의 난제였죠.

어릴 때부터 관심이 가는 것은 끝까지 파고들었던 것 같아요. 다 파고들었다 싶어야만 그 아이템을 놓아줬죠. 대상은 다양했어요. 지우개에 꽂히면 동네 문방구를 다 돌면서 모든 모양의 지우개를 하나씩 모아야 직성이 풀렸어요. 물건마다 디테일이 조금씩 다 다른데, 그걸 비교해보는 게 재밌었어요.

제 감도의 비결은 어릴 때부터 물건을 많이 사봤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수업료를 많이 지불한 거죠. 우선 경험을 많이 해봐야, 내 취향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어떤 것은 좋아하지 않는지 데이터가 쌓여요. 어떤 물건을 딱 한 개 사보고 “이건 내 취향이 아니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취향을 제대로 아는 것이 감각의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성수동 아틀리에 에크리튜 사무실에서 김재원 대표를 인터뷰했다. 카페 오르에르부터 소품샵 오르에르 아카이브, 문구점 포인트오브뷰, 과자점 오드투스윗까지, 김 대표는 성수 일대에 4개의 라이프스타일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롱블랙

Chapter 2.
탐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좋은 취향이 생긴다

경험은 확실히 차이를 만듭니다. 그럼 경험만 많으면 모두가 좋은 취향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탐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좋은 취향을 견지堅持할 수 있다고 믿어요. 양적인 더하기 말고 질적인 곱하기가 필요한데, 그것이 지적 탐구입니다.

제겐 텍스타일 디자인Textile Design을 공부했던 게 도움이 됐습니다. 고등학교 때 입시 미술을 하면서, 대학에 간다면 유학을 가겠다고 마음 먹었죠. 스무살에 영국 센트럴세인트마틴Central Saint Martin*에 입학했어요.
*런던 예술대학교 산하 디자인 학교. 패션·섬유디자인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학교로 평가받는다. 대표적인 동문으로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폴 스미스Paul Smith가 있다.

텍스타일 디자인은 말 그대로 직물을 설계하는 것을 말해요. 날염, 직조, 자수 등의 기술을 사용해 직물의 문양이나 조직을 디자인하죠. 영국에서는 텍스타일을 패션과 인테리어 두 종류로 나누는데, 그중 저는 인테리어 쪽 텍스타일을 전공했어요. 공간에서의 패브릭을 공부했죠.

텍스타일은 리서치research가 중요합니다. 저의 편집증적인 성향과 잘 맞았죠. 처음 텍스타일 공부를 시작할 때 저는 실에 꽂혔어요. 실은 생각보다 종류와 특성이 다양합니다. 회사마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생산된 실의 특성이 다르죠. 스코틀랜드 울과 아일랜드 울이 다르거든요. 브랜드와 지역별 실을 탐구해 나가다가 나중에는 빈티지 실을 팠어요. 빈티지 샵들을 돌다가, 공장까지 찾아갔어요. 일반 소비자는 모르는 빈티지 실 공장까지 발품을 팔아 찾아가는 거에요. 공장 한 켠 매장에서 마음에 드는 실을 구매할 때의 희열 같은 게 있었죠. 

한창 은에 빠졌을 땐 은 그릇, 은으로 만든 커트러리cutlery*를 파고 들기도 했어요. 영국은 은 제품에 문양을 새겨요. 어떤 동네의 어느 가문에서, 언제 만들었다는 표시에요. 마음에 드는 문양을 발견하면, 그 문양의 기원을 파고드는 거에요. 문양을 자세히 관찰하려면 돋보기가 필요하니까, 가장 좋은 돋보기도 찾게 되고요.
*식사에 쓰이는 나이프·포크·스푼을 통틀어 일컫는 용어.

그러다보니 의외로 깨달은 것도 있어요. 저는 물건에 대한 소유욕이 없더군요. 물건이 아닌, 물건을 갖기까지의 탐구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더라고요. 막상 제 손에 물건을 쥐는 순간엔 흥미를 잃어버려요. 

그러니까 제게 수집이란, 물건을 소유한다기보다 나의 지식과 경험치를 업그레이드하는 개념이에요. 심지어 요즘은 물건을 직접 다 모으지도 않아요. 엑셀 시트에 물건에 관한 정보를 정리해 보관하죠. 취미가 엑셀 정리일 정도로, 아름답게 정리해 두는 것을 좋아해요. 

좋아하는 카테고리 별로 엑셀 시트가 있어요. 해당 물건의 생산국, 연도, 히스토리, 작가, 사진, 가격 등을 도표로 만들어요. 그 물건에 관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게 즐거워요.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하나의 물건만 소유합니다.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거예요. 

‘이게 왜 특별한지’ 관심을 두고 지적 탐구를 해야만, 경험이 비로소 내 취향이 될 수 있습니다. 좋은 감각은 지식을 통해 얻은 다양한 관점을 비교하고 분석한 뒤에 나만의 선택이 만들어지는 지점에서 생겨난다고 봐요. 일본의 디자이너 미즈노 마나부가 “센스는 지식에서 길러진다”고 주장하는데, 동의합니다. 무언가를 파고 또 파면서 얻은 지식에서 센스가 길러지는 것이 아닐까요. 

취향에는 위아래가 없다 

취향을 기를 때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취향에 위아래가 있다고 오해하는 것입니다. 한때 저도 그런 오해를 했던 적이 있어요. 영국 유학 시절, 한창 꽃무늬에 빠져서 보자기와 이불,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꽃무늬 블록 도장 등 온갖 꽃무늬를 다 모았어요.
*영국의 유명인 텍스타일 디자이너. 19세기 대량생산 체제로 장인정신이 상실하는 것에 반대해 ‘아트 앤 크래프트art and craft’ 운동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창피해지더라고요. 내가 꽃무늬 취향이란 걸 누군가에게 들킬까봐 겁이 났죠. 취향이 바뀔 때마다, 이사를 갈 때마다 부끄러워진 취향의 물건들을 다 버렸어요. 그것들을 버리지 않았다면, 지금 편집샵을 한 다섯개쯤 더 열 수 있지 않았을까 해요.

비록 그때 내가 꽃무늬의 물건들을 버렸지언정, 꽃무늬를 탐구하며 얻은 지식과 나의 관점은 내 안에 남아 있겠죠. 지금은 취향은 높고 낮음이 없이, 이것에서 저것으로 ‘이동’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다양한 관심사로의 이동이 제게 즐거움을 줍니다. 

오르에르 아카이브에 진열된 소품들. 김재원 대표는 경험에 지적 탐구를 더해 감각과 취향을 쌓아 올렸다.

Chapter 3.
감도 높은 눈으로, 성수동을 발견하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보니, 한국에는 텍스타일 전공자가 갈 수 있는 길이 좁더군요.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는데 그게 부동산이었죠. 영국 유학 시절 갖게 된 하나의 취미였어요. 잘 살다가도 집주인이 나가라면 나가야하는 유학생 신세였거든요. 

집 보러 다니는 게 남의 살림살이 구경하는 기분이어서 재밌었어요. 나중에는 괜히 부자 동네 한번 가서 집들 구경하고 그랬죠. 한국에서도 취미 생활을 이어간 거예요. 그러다가 2014년 성수동을 발견했죠.

그때는 성수동에 프랜차이즈 빵집 하나 있을 때였어요. 대림창고도 말그대로 창고로 쓰이던 시절이죠. 2호선에 교통편도 좋은데 놀거리가 참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성수동이, 저는 참 재밌더라고요. 수입차가 돌아다니는데 그 옆에 공장 지게차가 지나가요. 워크웨어 점퍼 입은 공장 아저씨들 옆으로 잘 차려입은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지나가고요. 한남동, 청담동, 홍대나 경리단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성수동만의 매력이 있는 거죠. 

성수동이 영국의 이스트 런던East London처럼 될 수 있다고 봤어요. 런던도 웨스트는 부촌이지만 이스트는 낙후된 곳이었어요. 그러다가 쇼디치, 달스턴, 해크니 같은 런던 동쪽 지역이 2010년대 이후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 독립서점이 모여들면서 문화 공간으로 거듭났죠. 

성수동이 실제 서울의 동쪽이기도 하잖아요. 제가 런던에서 이스트 런던이 뜨는 것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성수동에서 뭔가를 먼저 해봐야겠다는 감이 왔어요. 

그러니까 저는 카페를 하고 싶어서 자그마치를 연 게 아니에요. 반대로 성수동에서 뭔가를 하고 싶어서 카페를 연 거죠. 우선순위 1번이 성수동에서 뭔가를 하자, 2번이 문화적인 활동이 이뤄지는 공간을 만들자, 3번이 공간에 카페를 만들면 문턱이 낮아질거다. 그런데 카페가 뜬 거예요. 자그마치에 이어 대림창고에 카페가 들어서고, 어니언 성수가 생기면서 성수동 자체에 유입 인구가 늘었죠.

2014년, 김재원 대표가 성수에 카페 ‘자그마치’를 연 뒤 (위)어니언·(아래)대림창고가 속속들이 들어섰고, 동네에 젊은 인구의 유입이 크게 늘었다. ⓒ카페어니언·대림창고

자그마치 : 성수에 안겨준 첫번째 놀라움

2014년 2월 자그마치를 열었어요. 인쇄공장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팝업이나 강연 같은 문화 행사를 했기 때문에 테이블은 큼직한 걸 놨어요.

자그마치*를 시작할 땐 비즈니스 마인드는 부족했어요. 브랜드만 생각했죠. 세금계산서, 부가세 신고 같은 숫자 개념이 없었어요. 브랜드 팝업 스토어도 수수료 없이 열었죠. 지금은 브랜드와 비즈니스가 발을 맞춰 가야 한다는 걸 늘 염두해요. 비즈니스라는 건 내가 얼마를 투자해서, 얼마의 수익을 내야 하고, 그걸로 어느 정도 재투자할 수 있는지 같은 숫자를 뜻하죠.
*자그마치는 2021년 7월을 끝으로 영업을 종료했다. 지금은 아틀리에 에크리튜 사무실과 작업실로 쓰인다. 

취향이 그대로 비즈니스가 될 수는 없다는 것도 이제는 알죠. 내가 가진 좋은 취향 가운데 될 만한 것을 하는 것이 중요해요. 저는 단추를 정말 좋아해서 많이 모아뒀어요. 하지만 단추로는 비즈니스를 만들기 어려울 것 같아서 시도하지는 않아요. 비즈니스를 하려면 좋은 취향 그 이상이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2014년 김재원 대표가 성수동에 문을 열었던 카페 ‘자그마치’. 인쇄공장으로 쓰였던 공간을 개조했다. 2021년 8월부터는 영업을 종료하고 아틀리에 에크리튜 사무실로 사용 되고 있다. ⓒ자그마치

Chapter 4.
기획은 텍스트에서 출발해야 한다 

제 기획의 출발은 텍스트입니다. 회사 이름Atelier Écriture의 에크리튜도 프랑스어로 ‘문자’라는 뜻이죠. 저는 기획 설계를 비주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기획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의사 소통에 오류가 없기 위해서라도 문자가 필요하죠. 

요즘엔 이미지 한 장을 보여주면서 “난 이런 스타일로 할거야”라고 설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게 정확히 어떤 스타일인가요? 원하는 기획 방향을 말과 글로 명확히 정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이나 글로 전달할 수 없다면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고, 당연하게도 비주얼로도 구현할 수 없게 됩니다.

① 오르에르 : 비슷한 취향을 가진 or와 er를 위한 공간

2015년 6월 문을 연 오르에르는 ‘~을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영어 접미사 ‘or’와 ‘er’에서 출발했어요. 성수동에 두번째 카페를 내기로 했을 때, ‘자그마치 2’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보다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을 기획하는 게 목표였죠. 성수동에 머무는 엔지니어, 장인들, 디자이너 등을 위한 만남의 장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건물도, 인쇄공장을 개조한 자그마치가 확 오픈됐다면 오르에르는 곳곳에 방이 위치해 아늑한 느낌을 주는 상가주택을 택했어요. 78년도에 지어진 총 9세대의 상가와 주택이 공존하는 독특한 구조에요. 건물 앞부분은 상가이고 뒷 부분은 주택이죠. 

1층은 카페, 2층은 디자이너들을 위한 작업 공간 라운지, 3층은 컨셉 스토어와 사무실로 꾸몄어요. 지금은 1,2층 모두 카페이고 3층은 소품샵 오르에르 아카이브로 운영해요.

그중 오르에르 아카이브는 2018년에 문을 열었어요.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수집품을 판매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죠. 영국 유학시절 사모은 도자기 인형, 100년 된 프랑스 빈티지 커트러리, 나무로 조각한 실험실 인체모형, 19세기 영국에서 만들어진 나무 촛대, 일본 메이지 시대의 그릇, 조선시대 해주 항아리 같은 것들을 팔고 있어요.

전 스스로를 아카이비스트archivist 라고 정의해왔어요. 물건을 탐구하는 과정을 즐기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이란 뜻이죠. 그런 저의 취향의 역사가 깃든 물품을 공유하는 공간인만큼 오르에르 아카이브라고 이름 붙였죠.

아카이브라는 컨셉에 충실히, 공간도 본래 모습을 살렸어요. 삐걱이는 바닥과 문을 보수하고, 반짝이는 바니시 칠을 벗겨내는 정도만 손댔습니다. 옛 주인이 쓰던 거실과 방의 구조도, 붉은빛이 도는 나무벽, 팔각형의 천정 장식까지 남겨뒀어요. 처음 3층의 이 나무 벽과 팔각형 천정을 보고 옛 외할머니 집이 떠올랐어요. 70년대 한국 주택의 특징인데, 이 형태를 남겨두는 것 또한 일종의 ‘공간 아카이브’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오르에르 아카이브의 전경. 김재원 대표가 국내·해외에서 들인 수집품이 진열돼 있다. 나무벽, 팔각형 천정 양식에서 70~80년대 한국 주택의 전형이 드러난다. ⓒ오르에르

② 포인트오브뷰 

도쿄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본 영화 『팬텀 스레드Phantom Thread』에서 영감을 받아 포인트오브뷰를 기획했어요. 이런 우연한 발견을 좋아해요. 영화 속 베이지색 배경과 검정 그림자를 투영한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했어요. 어릴 때부터 로망인 문구점을 만들겠다 마음 먹었죠. 

직원들은 걱정했어요. “문구점이 될까요?” 저는 비즈니스가 된다고 봤어요. 저 자신이 도구, 장비병 있는 사람이거든요. 도구가 달라지면 결과물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어요. 크리에이터는 생산적인 일을 하기 때문에 분명 저처럼 도구를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고 판단했어요.

포인트오브뷰의 근간에는 ‘관점’이란 단어가 있어요. 관점을 바꾸면 물건도 달리 보여요. 그게 창의적인 결과물을 내고요. 

관점을 바꾸면 모빌도 문구에요. 창의적인 활동을 할 때 펜과 노트 하나만 있다고 되나요?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하죠. 그럴 때 책상 위에 커다란 별 모양 모빌이 있다면 도움이 될 수 있죠. 머리 굴릴 때 당이 떨어지면 안 되니까, 초콜릿도 포인트오브뷰에서는 문구가 되고요. 이렇게 컨셉의 중심이 되는 단어를 하나 찾으면 계속 가지치기를 하며 기획을 키워나가요. 반드시 글로 정리하고요. 

포인트오브뷰의 로고인 사과도 ‘관점’을 상징합니다. 세잔의 사과를 모티브로 했거든요. 세잔*이 그린 『사과 바구니』를 보면, 관점이 다 뒤틀려 있어요. 뒤쪽 사과는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으로 그려진 반면 앞쪽 사과는 옆에서 본 모습으로 그려졌죠. 원근법처럼 소실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세상을 바라보지 않은 겁니다. “하나의 관점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 “사물은 각자의 관점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서 세잔의 사과를 로고로 정했어요.
*세잔은 생전 50세가 넘어서까지 미술계로부터 조롱을 당했지만, 피카소가 “세잔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할 만큼 후대에 인정 받았다. 

오르에르에 위치한 문구점 ‘포인트오브뷰’. 김재원 대표는 ‘창의적인 일’을 하는 크리에이터가 사용할 만한 물건을 들인다. ⓒ롱블랙

Chapter 5.
좋은 공간이란, 발견의 기쁨을 주는 곳 

발견의 기쁨이 있는 공간을 지향합니다. 매력적인 장치를 숨겨두는 능력이 중요해요. 너무 대놓고 말을 거는 공간은 매력이 덜하거든요. 발견한 사람만의 기쁨이 있잖아요. ‘나만 아는, 나니까 아는’ 기쁨이요. 대놓고 캡션을 써서 “이건 이런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말해주지 않아요. ‘이 숨겨놓은 매력을 내가 발견했네!’ 하는 뿌듯함을 주는 거예요. 

숨김의 미학은 ‘오르에르 손잡이’로부터 배웠어요. 원래 1층 카페 앞문에 손잡이가 없었어요. 마음에 드는 손잡이 디자인이 없어서 달지 않고 열었거든요. 처음 온 분들은 문이 없다고 생각하고 뒤쪽 나무문으로 돌아서 들어오셨죠. 1년 반을 그렇게 지냈는데 재밌는 게 관찰됐어요. 자랑하듯이 “너 여기 처음이니? 이게 문이야” 하면서 밀며 들어오는 분들이 생겨난 거예요. 

이런 포인트가 요즘 사람들에게는 소소한 재미나 자랑거리가 될 수 있구나 깨달았어요. 나중에는 너무 알려지는 바람에, 밀고 들어오는 문 쪽 페인트가 벗겨졌어요. 결국 손잡이를 달았죠. 이 손잡이도 황동으로 제작했어요.

2019년 12월 문을 연 과자가게 오드투스윗에도 발견의 기쁨을 여럿 두었어요. 오드투스윗은 ‘달콤함에 대한 찬가’란 뜻이에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를 좋아하거든요. 그의 시화집 중 ‘오드 포 뮤직ode for Music’에서 영감을 받았죠. BI는 클로버, 새입니다. 클로버는 행운을, 새는 손님을 상징해요. 손님들이 행운을 얻어가길 바란다는 뜻이에요.
*18~19세기 활동한 영국의 시인이자 화가. 자신이 직접 본 신비로운 환상을 시로 쓰고 그림을 그려 표현했다.

곳곳에 이 모티프인 클로버를 새겼어요. 찬장 손잡이, 직원이 착용하는 모자, 정원의 배수구까지 클로버를 새겨 넣어 제작했죠. 대리석 상판에는 시간의 흔적을 담고 싶어서, 모서리를 깎아 곡선으로 마무리 했고요. 

문의 유리창에는 클로버와 함께 ‘오드 투 스윗’이란 글자로 사이니지Signage를 붙였어요. 금빛 사이니지는 ‘골드 길딩Gold Guilding’이라는 영국의 전통 공예법으로 직접 만든 거예요. 사물 표면에 순금을 입혀서 완전히 안착시키는 기법입니다. 워낙 옛 기법이라 국내에는 기술자가 없어서 독학할 수 밖에 없었어요. 금도 이탈리아, 미국, 한국 금을 공수해 버려가며 3개월 만에 맘에 드는 빛깔을 만들 수 있었어요. 자세히 보면 유리창 안쪽에서는 이 글자가 금빛이 아닌데, 바깥에서 보면 금빛이에요.

과자가게 오드투스윗의 유리창에 붙은 금빛 사이니지. 김재원 대표는 영국의 전통 공예법을 동원해 글자에 순금을 입혔다. ⓒ오드투스윗 인스타그램

Chapter 6.
이페메라,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이 걸어오는 말

2020년부터는 외주 기획도 맡고 있습니다. 일을 택하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재미있을 것 같은가, 전에 해보지 않은 새로운 분야인가. 매트리스 브랜드 식스티세컨즈의 서브 브랜드 노트앤레스트Note&Rest의 브랜딩, 롯데백화점 편집숍 시시호시時時好時의 브랜딩과 공간 디렉팅 등을 했어요.

가장 최근 작업은 2021년 12월 성수동에 문을 연 LCDC입니다. SJ그룹에서 처음에 ‘여행’이란 컨셉을 제시한 게 재밌어서 수락했어요. 6개월 간의 브랜딩 끝에 ‘이야기 속의 이야기Le Conte des Contes’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1층 카페 이름은 이페메라Ephemera라고 붙였어요. 하루살이, 대수롭지 않은 물건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80평 카페가 제 이페메라로 가득하죠. 우편물, 티켓, 전단지 같은 유학시절부터 모아온 물건들입니다. 액자에 넣어 벽면 가득 채웠고, 유리 집기장에도 두었고요.

이페메라가 꼭 박물관 같다고들 이야기 해요. 제게 이페메라는 굉장히 소란스러운 공간입니다. 물건 하나하나가 가진 이야기가 많거든요. 어느 지역에서 언제 만들어졌고, 어떤 그래픽 디자인인지… 모든 이페메라가 내게 말을 거다고 상상하면 시끄러운 공간이죠. 그러니 이페메라에 오면 귀를 기울여 보세요. 

이페메라에 왔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나만의 기록물, 나의 이페메라를 꺼내본다면 제 기획 의도가 성공한 것이라 생각해요. 이페메라는 하나의 문화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전파하고 싶었어요. 이야기 거리가 있는 삶이 좋은 삶이니까요.

3층의 팝업 공간은 도어스doors라고 이름 붙였어요. 100평짜리 공간에 복도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10평씩 7개의 브랜드 공간을 만들었어요. 이름은 애니메이션 『몬스터 주식회사』를 떠올리며 붙였어요. 몬스터들이 벽장 문을 통해 아이들의 세계로 가잖아요. 고객이 각 방의 문을 열면 각 브랜드의 세계가 펼쳐지는 컨셉이에요.

생각해보면 제게 일이란 새로운 세계의 문을 계속 열어가면서 능력치를 쌓는 작업 같습니다. 문 여는 걸 좋아하니까 외주 일도 즐겁게 하는 것 같고요. “나한테 이런 능력이 있었어?”하며 놀라고는 하거든요.

누구나 아직 열지 않은 가능성의 문들이 있을 겁니다. 새로운 세계는 저절로 열리지 않아요. 문을 열 것인지, 얼마나 깊이 들어갈지는 자신이 결정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우선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겁니다.

2021년 12월 성수동에 문을 연 복합문화 공간 LCDC. 4층 규모의 건물 3동에 카페, 편집샵, 바 등의 매장이 들어섰다. ⓒLCDC


롱블랙 프렌즈 B

취향의 시대라고들 합니다. 마치 취향도 스펙처럼 쌓아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보곤 합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오늘 노트를 여러번 읽으시길 권합니다. 취향이란 무엇인지를 김재원 대표처럼 몸으로 배운 사람도 없을 테니까요.

오늘의 인상적인 문장을 적어봤습니다. 

1. 우선 경험을 많이 해봐야, 내 취향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게 왜 특별한지’ 관심을 두고 지적 탐구를 해야만, 경험이 비로소 내 취향이 될 수 있습니다.
3. 비즈니스를 하려면 좋은 취향 그 이상이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4. 원하는 기획 방향을 말과 글로 명확히 정의할 줄 알아야 합니다.
5. 매력적인 장치를 숨겨두는 능력이 중요해요. 너무 대놓고 말을 거는 공간은 매력이 덜하거든요.
6. 일이란 새로운 세계의 문을 계속 열어가면서 능력치를 쌓는 작업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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