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블랙 프렌즈 L
성수동 돌아다니다가 코사이어티cociety에서 재미있는 팝업을 봤어. 알로소Alloso라는 소파 브랜드가 게으름을 주제로 전시를 하더라고. 전시 주제가 게으름?
‘게으름이라니, 바쁜 내게 무슨 한가한 얘기?’ 하면서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점점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 특히 벽에 붙은 이 문구에 마음이 녹아내렸어.
“따스함, 부드러움, 편안함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 아닌가?
게으름을 피우며 빈둥거리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너무도 자연스러운데,
이를 설명하고 정당화해야 한다는 것은 이 시대의 미스터리이다.”
이본느 하우브리히Yvonne Haubrich라는 독일 작가가 한 말이래. 이 말을 듣고 주변을 돌아봤어. 1인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사람, 암체어에 기대 햇볕을 쬐는 사람… 아, 그래. 게으름이 원래 이렇게 달콤한 거였잖아.
내가 한참 잊고 있던 게으름의 가치를 일깨우다니, 이 브랜드 제법이야. 알로소가 궁금해졌어.
Chapter 1.
40년 사무용 가구 회사, 소파 브랜드에 도전하다
알로소. 이름만 듣고 난 수입 소파 브랜드인가 했어. 알고 보니 퍼시스FURSYS 그룹의 소파 브랜드더라? 일룸, 시디즈, 데스커 같은 브랜드로 유명하지. 사무용 가구로 출발한 40년 가구 회사가, 왜 소파 전문 브랜드를 만들었을까.
알로소는 2016년부터 퍼시스 그룹이 내놓은 세 번째 신사업이야. 2016년 사무용 가구 브랜드 데스커DESKER, 매트리스 브랜드 슬로우 베드SLOU BED에 이어, 2018년 소파 브랜드 알로소를 론칭했어.
알로소 론칭을 주도한 건 지금 퍼시스 그룹을 이끌고 있는 손태희 사장이야. 손 사장은 회사에서 사실상 신사업 PMproject manager으로 통해. 데스커와 슬로우 베드를 론칭할 때도 손 사장이 직접 PM 역할을 맡았지. 왜 사장이 신사업 론칭을 이끄느냐고? 리스크 때문이래.
“퍼시스·시디즈·일룸 같이 자리를 잡은 브랜드는 굳이 제가 맡을 필요가 없어요. 전문경영인 분들이 잘 이끌어 주시죠. 신사업은 달라요. 위험이 크잖아요. 위험을 과감히 떠안을 수 있는 사람이 이끌어야 직원들의 부담을 줄일 수 있어요.”
_손태희 퍼시스 그룹 사장, 롱블랙 인터뷰에서
손 사장은 2010년 퍼시스 그룹에 합류*했어. 대학에서 재료공학을, 대학원에서 물류를 전공하고 맥킨지에서 경영컨설턴트로 일했지. 경영을 배우던 당시 그가 알던 가구업은 이랬대. ‘시장 규모가 작고 진입 장벽이 낮아 큰 수익을 올리기는 힘든 산업.’
*2010년 입사 후 시디즈, 일룸, 퍼시스를 거쳐 2020년 퍼시스그룹 지주회사인 퍼시스홀딩스 사장으로 취임했다.
회사에 합류하고 첫 2년 동안 손 사장은 전국 가구 공장과 시공 현장에서 몸으로 일했어. 가구의 제작부터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익히기 위해서였지. 집집마다 가구를 설치하러 다닐 때, 그는 가구 사업이 뭔지를 알았대.
“한 가정집에 아이방 가구를 설치하러 갔을 때였어요. 문틈으로 계속 들여다보던 아이가, 저희가 나오니까 침대에 올라가서 방방 뛰고 손뼉을 치는 거예요. 그때 이 일이 의미를 처음으로 알았어요. 내가 하는 일이 가구를 파는 게 아니구나. 멋진 공간과 삶의 추억을 선물하는 일이구나, 하는 걸요.”
_손태희 퍼시스 그룹 사장
이후 손 사장은 가구로 통칭되는 시장을 깊게 파고들기 시작했어. 그리고 뾰족한 타깃을 가진 가구 브랜드를 잇달아 론칭해. 창업자와 디자이너의 취향을 맞춘 사무용 가구 ‘데스커’, 맞춤형 매트리스 브랜드 ‘슬로우 베드’를 2016년 한 해에 내놨어.
“가구를 소비자의 마음으로 보니 정말 다양한 시장이 있더라고요. 이 시장들에서 각각 1등을 하면 되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자연히 브랜드가 좁아질 수밖에 없었죠. ‘이 소비자는 어떤 가구가 필요할까’ 고민하고 제안을 던지는 거니까요.
예를 들면 데스커는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대화 나누고 기획한 거예요. 퍼시스는 좀 비싸고 중후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겐 어떤 사무용 가구가 필요할까, 생각한 거죠.”
_손태희 퍼시스 그룹 사장
왜 세 번째는 소파 브랜드였을까. 소파가 가장 패션과 닮은 가구이기 때문이래. 무슨 말이냐고?
“소파는 마치 옷을 닮았어요. 내 취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가구, 전체 집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가구죠. 사람들이 점점 자신의 취향을 집이란 공간에 담고 싶어 했고, 자연히 소파라는 카테고리도 무섭게 성장할 거라고 내다봤어요.”
_손태희 퍼시스 그룹 사장
2017년, 그렇게 시디즈 법인 산하에 소파 전문 브랜드 론칭팀이 꾸려졌어.
Chapter 2.
패스트 패션 같은 소파 시장, 타임리스timeless를 내걸다
잠깐 소파 시장 좀 분석해 볼까. 한국가구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소파 시장 규모는 2018년 기준 1조1000억원 안팎이야. 주목할 건 소파가 가정용 가구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6%나 된다는 거.
그런데 이 소파 시장, 규모에 비해 그렇게 발전하진 않았더라고. 일단 시스템을 갖춘 제조 시설이 거의 없어. 국내 소파의 60%는 개인 공방에서 만들어진다는 거 알았어? 브랜드를 걸고 만드는 소파는 40%에 불과한 셈이야.
브랜드 소파들마저도 실은 대부분 OEM(주문자상표부착) 제품들이야. 소파 제조 기술자가 보통 너덧, 많으면 여남은 명인 중소형 공장들이 다양한 회사에 소파를 납품하거든.
시즌 신상품을 준비할 때면, 가구회사 MDmerchandiser들이 OEM 공장을 찾아간대. 공장은 그때 시장 유행을 참고해서 샘플 소파 여러 개를 만든 뒤 쫙 깔아둬.
MD는 이 중에서 자사 신상품을 고르는 거야. “컬러를 더 밝게 해달라” “팔걸이는 내려달라” 하는 식으로 주문하지. 설계도면을 그리거나, 오리지널 디자인을 기획하는 일이 거의 없는 게 현실이란 거야.
잠깐, OEM 공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다양한 제품을 쏟아내는 것. 패스트 패션 시장을 닮지 않았어? 실제로 소파 전문 브랜드들은 한 시즌에만 수십 개의 신제품을 쏟아내. 국내 대표 소파 브랜드 웹페이지엔 870여개의 제품이 판매 중일 정도지.
아쉬운 건 이렇게 많은 제품이 나와도 각 브랜드를 대표하는 시그니처signature 디자인은 없다는 거. 한 시즌 반짝 팔고 나면, 유행을 좇아서 다른 신상품에 힘을 쏟아. 브랜드 소파를 구매한 사람도 집에 있는 소파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TF팀은 이 패턴을 극복하고 싶었대.
“프리츠 한센Fritz HANSEN*, 비트라vitra**처럼 사랑받는 브랜드는, 그 브랜드를 상징하는 소파 모델이 있거든요. 멀리서 실루엣만 봐도 그 브랜드가 떠오를 정도로 디자인이 독창적이죠. 그런 헤리티지heritage를 가진 브랜드가 한국에는 왜 없을까, 그게 아쉬웠어요.”
_손태희 퍼시스 그룹 사장
*1872년 캐비닛 제조사 프리츠 한센이 덴마크에서 설립한 가구 브랜드.
*1950년 빌리 펠바움과 아내 에리카 펠바움이 독일에서 설립한 가구 회사. 미국의 허먼 밀러가 생산하던, 찰스&레이 임스 가구의 유럽 판매권을 인수하며 이름을 알렸다.
자연히 소파 시장은 극도로 양분화돼. 수천만원에 달하는 오리지널 디자인의 수입 소파, 그리고 가격은 합리적이지만 디자인은 비슷비슷한 국산 소파로 말이야.
팀은 국내의 소파 제조 관행과 반대로 가기로 했어. ‘소파의 상품 기획부터 디자인, 개발, 제조를 직접 다 한다. 빠르게 신제품을 내는 걸 목표로 삼지 않는다. 디자인 헤리티지를 가지고, 한번 출시되면 오랫동안 사랑받는 타임리스Timeless 모델을 만든다.’ 그렇게 방향성이 정해졌어.
네이밍 : 알로소라는 이름을 짓다
팀이 꾸려진 건 2017년 5월. 19년차 소파 전문가 마미란 상품기획 파트장을 포함해 모두 네 명의 기획자가 달라붙었어. 마 파트장은 이탈리아 소파 브랜드 나뚜찌Natuzzi 출신이야. 2015년 퍼시스로 입사해 2년간 일룸에서 소파를 기획했지.
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페르소나를 뾰족하게 잡는 것. 트렌드에 밝고 소파 하나를 사도 전문 브랜드에서 꼼꼼히 고를 사람을 상상했지. 30대 패션지 편집자를 가상 페르소나로 정했어.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소파를 사도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소파 전문 브랜드를 찾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페르소나를 일부러 더 뾰족하게 잡았죠. 흥미로운 건 실제로 알로소엔 가상 페르소나를 닮은 고객이 경쟁 브랜드보다 많다는 거예요.”
_마미란 알로소 상품기획 파트장
네이밍은 ‘해외 브랜드인가?’ 싶도록 유도했어. 이국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대. 팀은 이름을 100개 넘게 지었어.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 작업까지 마치고 폐기한 이름이 있을 정도로 공을 들였지.
그래서 알로소, 라는 최종 이름은 무슨 뜻이냐고? 뜻이 없어.
“알로소는 세상에 없는 단어예요. 제가 만든 조어죠. 어떤 나라말인지 오묘한 무국적의 느낌이고, 어감이 좋았어요. 결국 이름이란 브랜드가 전하려는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_마미란 알로소 상품기획 파트장
Chapter 3.
디자인 씽킹을 소파에 접목하다
이제 상품이 나와야지. 알로소 상품 기획이 특별한 건 기획의 앞단을 매우 강하게 잡는다는 것. 퍼시스 그룹이 유럽의 유명 디자이너들과 협업하며 배운 거래. 알렉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 클라우디오 벨리니Claudio Bellini** 같은 디자이너들과 일하면서 손태희 사장은 “디자인이 나오는 절차가 완전히 다르다”고 느꼈대.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 겸 산업디자이너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디자인 거장으로 꼽힌다. 그로닝겐 미술관, 일본 히로시마 파라다이스타워를 설계했고, 춤추는 여인을 닮은 와인 오프너 ‘안나G’를 디자인했다. 알로소 암체어 뚜따TUTTA는 2019년 2월 세상을 떠난 그의 유작이 되었다.
**이탈리아 대표적인 산업 디자이너로 전세계를 누비며 ‘아르테미데’ ‘발터놀’ 등 명품 가구 회사와 일했다. 퍼시스그룹과 10년 넘게 협업을 하며 알로소의 대표 소파 케렌시아QUERENCIA, 보눔Bonum 등 여러 제품을 디자인했다.
“유럽 디자인팀은 확실히 앞쪽에 시간을 길게 써요. 어떤 콘셉트, 어떤 톤이 필요한지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해요. 그렇게 중심을 잡고 나면 정작 제품 스케치는 빠르게 나와요. 스케치가 우리가 잡은 콘셉트과 다르다고 생각하면 빠르게 엎고 다시 스케치하기도 하고요.
콘셉트가 확실하면 최종 결과물이 흔들리지가 않아요. 중심을 보면서 거기 맞게 디자인하니까요. 이 중심이 없으면 디자인하면서 외부를 쳐다봐요. 사람들이 좋아할까, 하면서 계속 디자인을 뜯어고쳐요. 이렇게 해선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가 생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_손태희 퍼시스 그룹 사장
사티 : 팔걸이를 등받이 높이로 올리다
앞단의 기획을 단단히 잡는 것. 팀은 디자인 씽킹 프로세스Design Thinking Process를 가구 기획에 적용해. 디자인 씽킹, 데이비드 켈리의 노트 기억나? 사용자 관찰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책을 제품 디자인에 녹여 넣는 거지.
보통 기업의 상품 출시 과정을 볼까? 기획팀이 시장을 조사하고, 제품 콘셉트를 도출해. 디자인팀은 이 콘셉트를 시각화하고, 개발팀은 그 디자인을 설계로 구현하지. 이후에 시제품 제작과 양산 프로세스가 진행돼.
디자인씽킹은 이런 순서도가 없어. 처음부터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가 한 자리에 모여. 아이디어 회의부터 시장 조사와 고객 관찰을 동시에, 반복해서 진행하지. 즉석에서 샘플을 만들어보고 콘셉트를 정교화할 수 있는 게 장점이야. 고객을 가까이 관찰하는 실무진들이 제품 방향을 계속 수정하며 잡아나갈 수 있어.
알로소의 첫 제품, 2018년에 나온 사티SATI를 볼까. 지금까지 알로소에서 가장 많이 팔린 모델이기도 해. 모양이 독특해. 팔걸이가 없거든. 세 면이 마치 단단한 벽처럼 사람을 감싸는 독특한 형태야.
사티는 ‘눈으로 보기만 해도 편안함이 확 느껴지는 소파는 없을까’하는 질문에서 출발했어. 소파의 기능보다, 한눈에 떠오르는 감성에 주목한 거지.
기획자가 디자이너에게 “팔걸이를 높인 소파를 그려주세요”라고 주문한 게 아니야. ‘보기만 해도 편안한 소파’ ‘부드러운 착좌감이 셰입shape에 드러나는 소파’ 같은 분명한 콘셉트를 정한거야. 팔걸이가 없는 파격적인 디자인에 처음엔 모두가 놀랐지만 콘셉트에 부합하는 디자인이라고 모두 인정했지.
“보통 소파 팔걸이를 베고 눕거나 팔을 기대잖아요. 그런데 팔걸이가 없어도 편하더라고요. 3면이 벽처럼 둘러져 있으니까, 모서리에 비스듬히 기대 쉴 수 있죠. 보자마자 소파가 나를 안아줄 것 같다는 느낌도 들고요.”
_마미란 알로소 상품기획 파트장
이런 상품 기획 프로세스, 사실 시간 투입이 만만치 않아. 한 소파가 탄생하는 데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8개월의 시간이 걸린대. 2018년 론칭한 알로소가 지금까지 겨우 23개의 소파 모델만 선보인 이유야.
Chapter 4.
한국인에게 맞는 소파란 무엇인가
사티만 독특한 게 아니야. 아기 코끼리 모양을 본뜬 암체어 엘머ELMER, 하트 모양을 본 뜬 모듈형 소파 케렌시아QUERENCIA, 사티처럼 등받이 높이만큼 팔걸이가 높지만 대각선으로 떨어지는 사누아SANNOIS… 모두 흔히 보던 디자인이 아니야.
그래서일까? 매장에서 이런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해. 딸은 사티가 좋다고 하는데 엄마는 싫다고 한다거나 딸은 패브릭 마감재가 좋은데 아빠는 고급 가죽이 좋다고 한다던가.
알로소 팀은 문득 궁금해졌어. 모두가 호불호 없이 좋아할 만한 소파는 없을까?
소파, 하면 편안함이잖아. 그럼 가장 편안하게 내 몸을 기댈 수 있는 건? 많은 사람들이 리클라이너를 떠올릴 거야. 알로소는 리클라이너에 대한 소비자들의 생각을 조사해봤어.
신기한 결과가 나왔어. 소비자들이 리클라이너, 하면 떠올리는 장·단점이 거의 일치한다는 거. 리클라이너를 좋아하든 아니든 말이야. 장점은 하나. 압도적 편안함. 내게 딱 맞는 각도를 찾을 수 있잖아. 반대로 단점은 세 가지나 됐어. 리클라이너는 대개 예쁘지가 않다. 오래 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고장이 잘 날 것 같다.
알로소는 이 단점들을 하나씩 해결하기로 했어. 일단 ‘리클라이너 같지 않은' 디자인에 집중했어. 부피감을 최대한 줄이고 각도 조절 버튼을 숨겼지. 내구성도 높였어. 소파 골격은 목재로 잡는다는 선입견을 깨고 철재로 구조를 잡았거든. 고장에 대한 걱정은 10년 무상 수리 보장으로 해결했대.
그렇게 알로소의 첫 번째 리클라이너 소파, 로바LOVA가 탄생했어. 로바는 2022년 3월 출시하자마자 알로소 매출 3위에 들었어. 보통은 출시 후 3개월쯤 지나야 반응이 오는데, 바로 반응이 온 거야.
Chapter 5.
스펙spec말고 가치를 팔아라
사실 알로소, 아직 시장에서 큰 존재라고 할 순 없어. 2022년 예상 매출액이 200억원. 매년 2배씩 성장하고 있지만, 퍼시스 그룹이 주력하는 신사업 치고 갈 길이 먼 게 사실이야
성수동 팝업을 돌아보면서 든 생각은 ‘그렇게 마음이 급하지 않나?’ 하는 거였어. 사실 당장 매출을 올리고 싶은 브랜드들은 좀더 공격적인 이벤트를 기획하잖아. 그런데 게으름이라니.
알로소 팀은 디자인 씽킹을 위해 고객을 만나다 이렇게 생각했대. ‘결국 우리가 파는 건, 소파 그 자체보다 쉼이로구나.’
우리에게 휴식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한국 사회에 이중성이 있다는 데 주목했어. 누구나 ‘아, 느긋하게 쉬고 싶다’고 느끼지만, 또 한편에선 ‘게으름을 피워선 안 된다’는 사회 분위기도 강하잖아. 소파에서 마음 편하게 게으름을 피우면 안 될까? 게으름이 정말 나쁜 걸까? 그래서 게으름의 가치를 찾아보기로 한 거지.
“현대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서 ‘게으름’은 곧 ‘나쁨’과 동의어 입니다. 그런데 살펴보면 게으름이 꼭 나쁜 건 아니거든요. 디자인 거장 알렉산드로 멘디니는 ‘나는 게으름에서 창조적 영감을 얻는다’고 했어요. 소파 이야기 말고, ‘떳떳한 게으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_정현진 알로소 마케팅 파트장
팝업 매장엔 세계 최초 리모콘이 전시돼 있어. 미국에서 직접 공수해 온 제품이야. 리모컨을 발명한 유진 폴리Eugene Polley*가 실은 엄청 게으른 사람이었대. TV 제조업체 엔지니어였던 폴리가 소파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리모콘을 개발한 거야. 게으름이 발명, 창조의 마중물이라는 게 재밌지 않아?
*1915~2012. 시카고 출신의 발명가로 자동차 라디오 버튼과 비디오 디스크 등을 발명했다.
이 외에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같은 창조자들을 떠올리며 게으름이 낳은 영감inspiration을 소개하는 공간들을 꾸몄어. 전시장 벽에 붙은 이런 명언들을 읽으니, 왠지 마음이 좀 편안해지는 거 있지.
‘나는 힘든 일을 하기 위해 항상 게으른 사람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게으른 사람은 그것을 하는 쉬운 방법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_빌 게이츠
“말하자면, 게으르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 그것은 슬기로움이나 너그러움의 한 형태다. 물러났다가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야 한다.”
_피에르 쌍소, 『게으름의 즐거움』에서
전시장을 나와 정원에 놓인 1인 소파에 앉았어. 몸과 마음을 늘어뜨리고 가을 하늘을 바라봤어.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 내게는 게으른 순간이 더 필요해. 브랜드가 가치를 판다는 건, 이런 거겠지?
Chapter 6.
브랜드란 축적해나가는 것이다
가치를 파는 브랜드, 좋아. 문제는 이런 식의 소통으로 얼마나 빨리 성장할 수 있느냐겠지. 알로소만 해도 아직 매출이나 인지도가 업계 1, 2위에 한참 못 미치잖아.
“브랜딩은 축적이라고 생각해요. 축적될 때까지 믿고 버티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죠.
성장을 숙제처럼 생각하는 기업이 많이 하는 실수가 있어요. 브랜드를 팔아서 돈을 버는 거예요. 저가로 물량 공세를 하거나, 경쟁사의 유력 제품을 베껴 더 싸게 만드는 거죠.
소비자가 알게 모르게 다 느낍니다. 어느 시점에 ‘이 브랜드 옛날 같지 않네’라고 말해요. 등을 돌립니다. 그때 이미 브랜드 수명은 끝난 거예요.”
_손태희 퍼시스 그룹 사장
알로소는 든든한 모기업이 있으니, 버티는 힘이야 있겠네. 궁금한 건, 그래서 알로소는 어떤 브랜드가 되길 원하는 걸까?
“세계 시장에서도 프리미엄이라고 인정받는 가구 브랜드가 한국에서 나왔으면 좋겠어요. 삼성전자의 갤럭시,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 같은 브랜드가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죠. 버티면서 쌓아나가려고 합니다.”
_손태희 퍼시스 그룹 사장
롱블랙 프렌즈 L
알로소의 팝업 스토어에 최고급 이태리 가죽, 3중 메모리폼 같은 설명이 없는 게 나는 좋았어. 팝업에 다녀오니 늦은 오후더라. 소파에 누워서 음악 들으면서 만화책 한참 읽었잖아.
오늘 노트를 정리할게.
1. 퍼시스 그룹은 2018년 소파 전문 브랜드 알로소를 론칭했어. 점점 버티컬 해지는 국내 가구 시장에서, 소파란 아이템이 주목받는 걸 발견한 거야.
2. 국내 소파 시장은 패스트 패션 시장을 닮았어. OEM 업체를 통해 한 시즌에만 수십개씩 신제품을 찍어내. 알로소는 오히려 타임리스 전략을 택했어. 론칭 후 4년간 스무여 개의 제품만을 내놓았지.
3. 소파는 디자인 씽킹 방식으로 만들어. 해외 디자이너 협업으로 일의 앞단이 탄탄할수록 브랜드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배웠거든.
4. 알로소는 제품을 넘어 가치를 파는 브랜드를 지향해. '떳떳한 게으름'을 주제로 팝업 전시를 기획한 이유야.
5. 손태희 사장은 브랜딩이란 축적해나가는 것이라고 믿어. 성장을 위해 브랜드를 깎아먹으며 돈을 벌지는 않고 싶대.
롱블랙 피플, 첫번째 ‘위드 롱블랙’ 노트 어땠어? 알로소가 더 궁금하다면 성수동 코사이어티 팝업에 가는 거 추천해. 그리고 앞으로도 ‘위드 롱블랙’을 통해 감각적인 브랜드의 이야기 많이 전할게. 기대해줘!